그 뒤로 나는 되도록 말은 않고 오직 소처럼 묵묵히 일만 하기로 굳게 작정을 했다. 어줍잖은 일로 호된 야단을 맞고 부터 나는 일복이 많은 돌장승이 됐던 거다.
열두냥 짜리 인생 노래
보고서를 지정된 시간 내에 제출하지 못하는 경우란 용납되지 않았다. 월말까지면 월말 이전에 내야만 했다. 2주 내로, 다음주 목요일까지. 내일 오후까지. 끝내 다음날 출근 전까지로 시간은 매우 촉박하게 계속 지정되었다. 그러나 불티나게 뛰어서 지정된 시간 내에 제출한 보고서에 대하여 아무런 하회가 없었다. 다만 새로운 업무 지시만 산더미처럼 쌓였다.
가성소다, 빙초산, 윤활유 등과 나중에 소총 사업까지도 극비밀리에 조사 보고했으나 한결같이 사업계획 추진의 청신호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실무진들 사이에 심한 갈등과 술렁임이 일었다. 아무리 체계를 갖춰 글자 한 자 획 하나까지 틀림없이 시간 내에 극비밀로 잘 써낸 보고서라고, 보고 뒤엔 ‘꿩 구워 먹은 자리’였다. 헛일만 한 것이다. 공연히 시간이 없다. 글자가 틀렸다고 트집만 부렸지 실제로는 실무자들에게 ‘범 꽁무니’를 시키며 우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평로에 있던 중국집 이층에 모인 우리 실무진들은 울분 같은 좌절의 갈등을 느끼며, 배갈을 마시고는 ‘열두 냥 짜리 인생’이나 ‘회전 의자’란 노래를 합창하고 헤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진짜 ‘나일론’인 플라스틱에 착안했다. 지금까지 계속 시간에 쫓기기만 하며 조사한 보고서들은 별 쓸모 없는 것들이었나 보다. 국가 사회에 기여하며, 수익성 있는 성장 사업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헛맴을 돌았을 뿐이었다.
그로써 한국화약은 그 당시의 신한베아링을 인수하기 앞서, 석유화학에 대한 구상의 윤곽을 잡기 시작했다. 서울 시청앞 본사 옥상과 인천화약공장 연구과에서는 청사진 틀에 매달려 연일 수많은 청사진을 구워냈다. 그 많은 청사진 가운데 60년대 중반, 하나의 뚜렷하고 볼품 있는 청사진 한 장이 구워져 나왔다. 이름하여 ‘석유화학공업 계열도.’
이 용어는 지금도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정유공장- 나프타 분해공장-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 BTX- VCM- PVC- 폴리에틸렌- 합성고무- 합성세제- 합성섬유...... 등등 생활과 직결되는 각종 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사업이었다.
계열화된 사업. 우리 국내는 물론 세계와 발맞출 사업. 그림으로 그려도 몇 아름드리 큰 나무 둥치의 무지하게 큰 거수(巨樹)의 청사진을 놓고 모두들 희망에 벅찼으며, 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마치 소풍 가기 전날 밤의 소년처럼 희열과 설레임 속에 잠겼다. ‘고기는 잡지도 않고 한 마리 반씩 가른다’ 듯이, 청사진만 보고도 보람에 찼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온몸 가득히 일고 있었다.
60년대는 석탄에서 석유로 옮아가는 시대였다. 에너지는 물론 화학 공업 원료도, 국내 정유산업이 겨우 태동하여 울산 정유공장이 64년 봄부터 일간 3만 5천 배럴을 가동하고 있을 때, 한국화약은 방대한 석유화학 사업계획을 단계적으로 추진키로 하여, 우선 PVC 공장 사업계획부터 작성했더니, 드디어 위에서 청신호가 떨어졌다. 아! 얼마나 기다렸던 푸른 신호냐! 소리 없는 환성을 지르며 공장 건설 계획에 몰입했다.
진해 PVC공장 건설사업을 추진할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지만 매일 밤 11시 이전에 사무실 등이 꺼진 적이 없었다. 지금의 서울프라자호텔 자리에 있던 옛 한국화약 사옥 6층, 기획실은 신이 나서 온통 열기로 가득 찼다. 더위에 지친 우리는 냉수를 떠다가 발을 담그기도 하고, 선풍기가 귀하던 시절이라 창문은 모조리 떼어냈었다. 연신 세수를 하고 냉수를 마셨으나 열기는 쉽사리 식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안팎의 열기를 견디다 못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처음에 웃옷을, 다음엔 러닝 셔츠를, 끝내 바지까지 홀랑 벗고, 홑것 한 가지만 걸친 벌거숭이로 밤일을 하여, 진해 PVC 공장 건설은 차츰 궤도에 올랐다.
그때 실무진들 사이엔 애사심이니 체면이니 하는 용어가 아예 없었다. 모든 것을 몸으로 실천했을 뿐이었다. 진해 PVC 공장 건설이 본궤도에 올라 일본으로 기술 연수를 받으러 여남은 명의 동료들이 출국하는 뒤치다꺼리를 끝낸 어느 날,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어느 마나님은 비만 오면 죽은 영감님 생각이 줄금줄금 난다던데, 나는 문득 열두 냥 짜리 사내가 한없이 부러워졌다. 비 쏟아지는 날은 어쩔 수 없이 쉬게 마련인 공사판의 그 사나이가 부러워진 것이다. 하루만, 아니 반나절이라도 좋으니 휴식을 좀 가져봤으면 더는 바랄 것이 없을 듯했다. 그보다 더한 소원이 또 어디 있으랴.
어느 해인들 덥지 않으리요만 병오 정미(丙午 丁未) 이태는 찌는 듯이 더웠다. 꼭 금년처럼 가물고도 무더운 긴 여름이었다. 소나기도 한 줄금 없이 쨍쨍한 햇볕만 내리쪼이는 찜통 같은 날씨였다.
나에겐 좀 우스운 소원이 생겼다. 덕수궁을 한 바퀴만 돌아보는 것이 바로 그 소원이었다. 전찻길만 건너면 대한문인데...... 덕수궁에 가본 적이 언제였던가? 그게 4년 전이던가? 아마도 5년은 더 넘은 듯했다. 내게 덕수궁에 가야할 특별한 볼일이나, 거기 어떤 행사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한번 휙 돌고 오면 몸과 마음이 가뿐할 것처럼 느껴졌으나, 시간에 쫓겨 전찻길만 건너면 되는 덕수궁에도 못 가보는 주제에, 어찌 잠 한숨 더 자기를 바랐으리요. 밤이 되면 서로 잎을 보듬고 잠드는 자귀나무가 부러웠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또 다른 몇 밤을 새우고 제2 정유공장 사업계획서를 작성했는지 모른다. 동양석유공업주식회사(가칭)가 한화에너지(주) 즉 경인에너지주식회사를 낳게 한 뿌리였다. 일에 미친 나는 혼신의 힘으로 열중했다. 정부에서 그해 6월 10일까지를 신청서의 마감일로 못박아 공모를 하고 있었으니, 오줌 누고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국영문으로 계약서를 작성하랴, 공판인쇄 하랴, 정부에 신청서 내랴, 다른 회사의 동태도 파악하랴, 속담에 ‘눈이 빠져도 거미라고 떼어버린다’더니, 일속에 묻혀 나를 잊은 꼴이었다.
대망의 석유화학사업의 진수인 나프타 분해공장 건설을 위한 타당성 조사를 실시했다. 플라스틱 가공업체를 필두로 도매상과 소매상, 동대문시장 상인, 고무신 장수까지 만나며 몇 달을 돌아다녔던가? 석유화학 사업은 우리의 꿈이요 희망이며, 그 자체가 긍지요 포부였기에, 사무실에선 밤마다 이력이 난 대로 발가벗고 일을 했다. 통행금지에 쫓겨 늦은 밤시간에 헤어질 때 인사는 “내일 맑은 정신으로 일합시다.”로 “퇴근합시다”나 “집에 갑시다.”를 대신했다.
어느 날은, 외국 손님을 공항에서 맞아 오라는 지시를 받고, 외빈용 승용차로 모셔 오던 길에 그 외국인이 묻기를,
“김 선생 차는 없소이까?(Don't you have a car, Mr. Kim?)" 하길래,
“예, 아직 내 차는 없소이다(Yes, I don't have a car, yet.)" 했더니, 그 외국인의 눈이 화등잔 만큼 커졌다.
“아니, 뭐라고요?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처음엔 있다고 해 놓고 나서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이요? 누굴 놀리는 거요?”
하며 자못 험악하게 나왔다.
‘허, 참, 내가 언제 있다고 했다가 없다고 했지?’ 하고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차, 실수했구나.’ 싶었다.
Yes면 Yes고, No면 No지, Yes, I don't.라 했으니 혼란을 자초한 것이로구나.
“미안하외다. 외국어가 좀 서툴러서.”
나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렇듯 수많은 우여곡절과 웃지 못할 일들을 겪으면서 타당성 조사보고서와 사업계획서를 어렵사리 정부에다 제출하였다.
그러나, 아~! 하늘도 무심했다.
진땀 흘린 보람도, 남모르게 코피를 쏟은 보람도, 몇 밤을 하얗게 밝힌 보람도 없이 제2 정유공장과 나프타 분해공장의 실수요자는 다른 업체로 지정되었다는 정부의 발표였다.
그것이 병오 정미 이태에 걸쳐 연달아 일어났다. 돌아가신 현암 회장님을 비롯한 임원들과 우리 실무진들의 실망은 너무도 컸다. 하늘이 무너진 듯 하다고나 할까? 목이 막혀 말도 못하고, ‘얼음에 자빠진 소’ 모양 넋을 잃었다. 윗분들은 우리의 등만 어루만지시며 인왕산 위로 떠가는 흰구름을 응시하는 듯했으나 그분들 눈에도 이슬이 맺혔던 것 같다. 누구도 누구를 위로하거나 격려해 주진 못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입을 연다는 것이 큰 죄를 저지르는 듯한 분위기는 한참동안 계속 됐다.
이때 나도 모르게 인천공장 생각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인천화약 공장 풀숲에는 수많은 뱀들이 득실거리며 살고 있었다. 장난기 어린 나는 애기뱀 한 마리를 잡아 누군가의 빈 도시락에 숨겨 넣을까 하다가, 차마 그럴 수가 없어, 개구리로 바꿔 넣었던 기억을 되살리고 혼자 씩 웃었다. 생각은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월간 '다이나마이트' 문예백일장 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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