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 있는 배우만 80여명… 말의 힘으로 관객을 웃기고 울리네
[영화 리뷰] 말모이
실제로 '말모이'는 관객의 예측에서 단 한 발자국도 빗겨 서지 않는 전형적인 신파극이다. 너무 뻔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극장은 웃긴 장면에선 웃음바다가 되고 감동적인 장면에선 눈물 숨기느라 적막해진다.
주시경 선생의 친필 원고가 든 류정환 조선어학회 대표(윤계상)의 가방을 전과자 김판수(유해진)가 훔치다 걸린다. 필연인지 우연인지 다음 날 조선어학회 심부름꾼 면접을 온 이가 판수다. 정환은 한글을 떼는 조건으로 까막눈 판수를 고용한다. "벤또건 도시락이건, 먹을 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요?"라던 판수는 점점 언어의 힘을 알게 되고, 주시경 선생이 끝내 완성하지 못한 '말모이'(우리말 사전)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총칼이 아닌 언어로 일제에 맞서는 내용이다 보니 영화에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다. 심금을 울리는 건 이 영화가 가진 '말의 힘'에 있다. 135분이라는 무거운 러닝타임을 오직 배우들의 대사로만 채워 나가지만 지루하지 않다. 웃기는 장면에서 온전히 웃기고, 슬픈 장면에서는 슬프다. 촘촘히 짜인 각본 덕이다.
'말모이'는 관객 1200만명을 동원한 '택시운전사'의 각본을 쓴 엄유나 감독의 데뷔작이다. 엄 감독은 "다른 시대물과 달리 어떤 특별하고 거대한 사건이 개입하는 이야기가 아니다"라며 "'말모이'니만큼 말로 승부를 보는 작품"이라고 했다. 덕분에 영화에는 대사가 있는 배우만 80명 넘게 나온다.
유해진은 단연 돋보이는 소리꾼이다. 판이 조금이라도 지루해질 때면 어김없이 휘모리장단처럼 몰아치는 연기로 극의 완급을 조절한다. 자연스레 관객은 '잘한다' '얼쑤'라는 추임새를 속으로 되뇐다.
'말모이'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짜낸 창작물의 좋은 사례로도 남을 것이다. 1942년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과 관련자들을 집단 체포하고 투옥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허구의 인물들이 벌이는 이야기를 펼쳤음에도 거북함이 없다. 역사가 주목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실제 겪었을 법한 이야기라서다. 흥미를 위해 역사를 왜곡하지도 않는다. 선을 지키면서도 재밌는 시대물을 만들 수 있다는 감독의 자신감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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