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우기만 하는 공부가 나라를 망쳤다”
입력 2021.03.23 03:00 | 수정 2021.03.23 03:00
1801년 정약전(설경구)은 서학(천주교)을 믿은 죄로 세상의 끝 흑산도로 유배된다. “사방에서 칼이 들어오고 오물을 뒤집어씌워도,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한다”던 왕의 말이 파도 소리와 함께 귓바퀴에 맴돈다. 홍어, 문어, 짱뚱어···. 바다 생물에 호기심이 생긴 정약전은 물고기 길까지 훤히 아는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에게 끌린다.
'자산어보'는 19세기 초 조선시대를 무채색(흑백)으로 담았다. 흑산도에 유배된 학자 정약전(설경구)은 어부 창대(변요한)에게 글을 가르쳐주며 창대가 가진 물고기 지식을 배운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상놈이 공부를 왜 하냐?”(정약전)
“사람 노릇 헐라고요.”(창대)
31일 개봉하는 영화 ‘자산어보’(감독 이준익)가 길어 올린 것은 물고기가 아니다. 사람 노릇이다. 시대와 불화하는 두 인물, 정약전과 창대를 통해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창대가 혼자 글 공부를 하며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알게 된 정약전은 “내가 아는 지식과 너의 물고기 지식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서학 죄인이라며 거리를 두던 창대는 돕는 게 아니라 거래일 뿐이라는 말에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인다. 세상에 치인 학자와 출세를 꿈꾸는 어부는 서로의 스승이 되지만 갈등할 수밖에 없는 관계다.
1814년 정약전이 지은 어류학서 ‘자산어보(玆山魚譜)’에 창대는 이름만 나오지 행적이 없다. 이 영화의 두 기둥 중 하나는 허구인 셈이다. 이준익 감독은 ‘동주’ ‘박열’에 이어 이번 사극에서도 사건이 아닌 사람을 이야기의 동력으로 삼았다. 정약전의 동생 정약용(류승룡)과 ‘목민심서’도 등장한다. 설경구와 변요한은 섬에서 살듯이 연기했는데 특히 변요한은 ‘나는 창대다!’를 온몸으로 내뿜는다. 정약전을 돕는 흑산도 여인 가거댁(이정은)도 이 묵직한 영화에 꼭 필요한 웃음과 생활감을 더한다. 다만, 컬러를 배제한 흑백영화라서 표정과 감정이 더 잘 드러난다는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정약전은 애매한 성리학 대신 명징한 사물 공부로 눈을 돌렸다. 200년 전 이야기지만 “질문이 곧 공부다. 외우기만 하는 공부가 나라를 망쳤다”는 그의 대사는 오늘 이곳을 향한 호통처럼 들린다. 학자가 사실을 토대로 진실에 다가간다면 영화는 허구를 통해 진실에 도전한다. 정약전과 정약용의 가치관이 어떻게 다른지, 창대가 결국 어떤 ‘사람 노릇’을 선택하는지가 볼거리다. 섬의 절벽 위에 지은 초가집 세트는 촬영 기간 중 세 번의 태풍과 가을장마를 만났다고 한다. 무엇보다 자연이 오롯이 담긴 영화다. 1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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