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준다는 것

입력 2021.12.15 00:00
2009년 2월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가 마련된 명동성당을 찾은 추모객이 성당 입구에 전시된 김 추기경 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 김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 시절 모든 소속 사제의 영명축일엔 축하 전화를 직접 했다고 한다. /주완중 기자

◇김수환 추기경의 ‘영명축일 축하 전화’

얼마전 천주교 서울대교구 신부님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의 모든 사제들의 영명(靈名) 축일 아침엔 직접 전화를 걸어 축하해줬다는 겁니다. 영명 축일이란 천주교에서 세례명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으면 ‘스테파노’ ‘니콜라오’ ‘안드레아’ ‘베드로’ 등 세례명을 받게 되지요. 세례명은 성인의 이름을 따서 짓는데요, 그 성인의 축일이 영명 축일입니다.

그 신부님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서울대교구 소속 모든 신부들의 영명축일이 되면 오전 9시쯤 교구장실에서 전화가 옵니다. 물론 ‘베드로’ ‘바오로’처럼 여러 사람이 쓰는 세례명일 경우엔 정각 9시가 아니라 서품 순서에 따라 좀 늦게 전화가 걸려 오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늦어도 오전 9시 10~15분이면 정확히 전화가 옵니다. 통화는 간단합니다. ‘신부, 잘 지내지? 축일 축하해’가 거의 내용의 전부입니다. 전부 다 해서 한 10초쯤 걸릴까요? 그렇지만 교구장이 내 영명 축일을 기억하고 축하해준다는 것은 무척 감명 깊은 일이었습니다. 그 한 통화가 큰 힘이 되곤 했습니다.”

아마도 당시 김 추기경의 비서신부나 비서수녀는 교구 사제들의 영명 축일 리스트를 가지고 있었겠지요. 그리고 아침마다 김 추기경에게 그날 영명축일을 맞은 사제 명단을 드리고 전화를 돌렸겠지요. 축하 전화를 받는 신부들도 그런 배경을 충분히 짐작했겠지요. 그럼에도 교구장으로부터 직접 축하 전화를 받는 일은 감격스러웠답니다.

그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핸드폰도 없던 1970~90년대, 신부님들이 아침에 전화통 앞에서 교구장의 축하 전화를 기다리는 풍경이 저절로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김 추기경은 때로는 아무 예고 없이 각 성당을 방문하기도 했답니다. ‘근처를 지나는 길에 들렀는데 화장실 좀 쓰자’며 사제관에 들르기도 했다지요. 화장실을 다녀와서는 “별 일 없지?”라고 씩 웃으며 떠나셨다지요. 아마도 김 추기경은 해당 성당의 신부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나는 길에 우연히 방문한 것처럼 들러서 “응원하고 있어. 힘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한 것은 아닐까요.

1970~80년대 서울 내수동교회 담임목사를 지내며 청년대학생이 부흥하는 교회로 이끈 박희천 목사. 그는 담임목사 시절 교인 900명의 이름을 다 외웠다고 한다. /조선일보DB

◇1970년대 서울 내수동 교회

서울 내수동교회 담임목사를 20여년간 맡았던 박희천 목사님의 책 ‘내가 사랑한 성경’엔 교인들 이름을 다 암기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박 목사님은 당시 주일 예배 전날인 토요일이면 교인 카드를 모아놓고 하나하나 이름과 사진을 대조해가며 외웠다고 하지요. 그뿐 아니라 교인들의 부모, 자녀, 손자녀까지 가족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방을 갈 때면 그 가족의 상황에 맞는 성경 구절을 따로 준비했다고 하지요. 교인이 상(喪)을 당하면 목사님 내외가 직접 염까지 했고요. 교인이 점점 늘어 나중엔 900명 가까운 교인들의 이름을 외웠다고 책에서 밝혔습니다.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주고 가정사까지 챙기는 목사님에게 교인들이 어떤 마음을 느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되지요.

 

◇1988년 강원도 군부대

군에 입대했을 때 제가 속한 부대는 하루가 멀다하고 신병이 전입해오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방 철책 근무를 앞두고 대대, 중대, 소대의 정원을 다 채워야했거든요. 저보다 2개월 앞선 고참부터 1주일 단위로 신병이 보충되기 시작해 제 밑으로도 계속 들어왔습니다. 2~3개월 동안 신병이 물밀 듯 쏟아졌습니다. 하도 신병이 쏟아지니 고참들조차 옆 소대 신병은 물론 자기 소대 신병 이름을 외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신기한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당시 대대장이 거의 전 대대원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장교와 부사관은 물론 고참과 신병까지 대부분 이름을 알고 부르더군요. 가만히 살펴보니 군복을 입고 있을 땐 명찰을 보지만 체육복을 입었을 때에는 말을 걸거나 툭 치면서 안부를 묻는 방식으로 이름을 하나하나 외우는 것 같았습니다. 군대에서는 직속상관이 말을 걸거나 툭 건드리면 조건반사적으로 “이병! ”하며 관등성명을 외쳐야 하거든요. 그는 그런 방식으로 400명은 족히 넘었을 모든 대대원의 이름을 외워버린 것이죠.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신병 입장에서 대대장이 제 이름을 알고 불러주니 배려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신부님께 김 추기경님의 에피소드를 듣다보니 제가 군대생활 할 때 대대장 역시 틈 날 때마다 대대원의 신상명세표를 놓고 사진과 대조해가며 이름을 외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리더십에 관해 거창한 이론들이 많습니다. 다 일리가 있는 이론들이겠지요. 그렇지만 리더십의 중요한 첫걸음은 구성원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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