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실패
1958년의 본격적인 입시철이 돌아왔다. 그동안 부산 영주동 학술 숙부님 댁에 기식하며 사촌 명숙이와 대석이가 단칸방에서 사는데 끼어서 공부를 하며 새벽 5시면 점심밥을 싸들고 부산연수학원이란
데를 다녔다. 점심시간엔 도서관에 가서 뜨끈한 멸치 국물만 50환에 파는 것이 있어 그걸 한 그릇 사서 밥을 말아먹곤 했다. 그때도 목표는 오로지 서울공대 토목과였다. 그때까지의 내 편협한 생각에는 서울공대가 아니면 대학 같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서울에 연고가 아무도 없으니 어디 가서 머물며 시험을 친다? 어찌어찌 포항에서 공대에 시험 치러 가는 패거리를 만나서 서울 용두동에다 하숙을 정했다. 그때만 하여도 용두동에는 논밭이 즐비했고 주택은 띄엄띄엄 있었다.
용두동에서 양주군 노해면에 있던 서울공대를 찾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디까지인지는 몰라도 한참 버스를 타고 갔는데 그게 청량리인지 홍릉인지 모르겠지만 거기서는 군용 지프차가 수험생들을 실어 날랐다. 한 차에 적게는 10여 명, 많게는 20여 명이 주렁주렁 재주껏 매달려서 가는 합승이었다. 그것도 요금을 내야만 매달려 갈 수 있게 조수가 허락하는 방식이었다. 군용 지프차가 후생사업을 하는 모양이라 여러 대이긴 해도 학생들이 워낙 많으니까 잡아타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지프차에 매달려 가지고 서울공대에 가서 시험을 봤는데, 나중에 신문에 난 합격자 발표를 보니 보기 좋게 낙방이었다. 시험도 못 쳐 봤던 작년에 비해 이젠 어디 하소할 데도 없고 푸념할 형편도 아니어서 다가온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한담? 그 시절에 3수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에이 차라리 무시험전형을 하는 연세대학교에 미리 도전해 볼 걸 그랬구나 하고 후회를 한들 이미 송아지는 물 건너 간 뒤였다. 이제 대학 꿈은 접어야 할 때가 온 듯했다. 재수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서울 공대에 떨어졌으니 뭔가 안타깝고 참으로 아쉬웠다. 고향집에서 혼자 공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학술 숙부님으로부터 부산 연세대학에서 대학 진학반 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그소식을 그 어른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나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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