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두 가지, 쌀밥과 잠 1
대학생이 되고 나서까지도 내 소원은 딱 두 가지였으니, 하나는 잠을 실컷 자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쌀밥을 먹는 것이었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소유의 논은 3마지기뿐이고 나머지 10마지기는 소작이었지 싶다. 거기서 나는 소출로 지주에게 소작료를 주고 나면 우리 식구(할머니, 부모님, 학술 숙부님 내외, 나 그리고 권실이) 양식이 딸릴 정도였다. 벼는 타작해서 소작료를 내지만 보리나 밀은 소작료를 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땐 ‘당갈림’이라고 해서 벼 수확량을 지주와 소작이 반반씩 나누기도 했는데 어떤 지주는 소작에게 적게 주는 4:6, 또는 3:7을 요구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런 소작논조차도 도무지 얻기가 매우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벼를 수확하면 겨울 내내 쌀밥만 먹어야 했고, 보리를 수확할 때쯤 되면 쌀이 떨어져서 보리이삭을 잘라다 솥에 쪄서 디딜방아에 찧어 먹는 ‘떡보리’란 것을 만들어 먹어야만 했다. 보리나 밀이 수확되면 여름 내내 꽁보리밥이나 뻘건 밀가루 국수나 수제비로 끼니를 때웠으니, 겨울이면 쌀밥에 ‘배밑’으로 보리쌀을 안칠 수도 없었고, 여름이면 보리밥에 웁쌀을 얹을 수도 없었으나, 나이든 어른이 계시니 한여름의 꽁보리밥에도 웁쌀을 한 옴큼 얹어서 할머니만 퍼 드리는 수밖에 없었기에, 나는 여름에 꽁보리밥을 먹는 것이 참으로 싫었다. 말을 바꾸면 쌀밥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리고 부산에서 대학 1학년에 다닐 때 나는 학술 숙부님 댁에 기식을 하고 있었는데, 형편이 넉넉지 못하다 보니 여름에는 수제비나 칼국수를 자주 끓여 먹었다. 그런데 국물을 우려낼 것이 마땅치 않아 숙모님이 생선시장에 가서 고등어 대가리만 헐값에 사오곤 했다. 보통 주부들이 고등어를 살 때 생선장수에게 미리 장만해 달라고 하면, 머리와 내장을 제거하고 토막을 낸 다음 팔았다.
그렇게 제거된 고등어 대가리는 동물사료용으로 팔기도 했는데, 우리가 그걸 사다가 푹 고아서 국물을 내면 그게 수제비가 됐든 칼국수가 됐든 엄청나게 맛이 좋았다. 고등어대가리를 사는 값으로 멸치를 사 가지고는 도저히 게임이 되지 않을 만큼 맛이 있긴 해도 그게 밀가루 음식이다 보니 쌀밥을 먹고 싶은 마음을 달래기엔 부족했던 것이다.
내 또 하나의 소원은 잠자기다. 나는 저녁 9시만 되면 잠자리에 든다. 이 버릇은 고등학교 3학년 때 경주서 하숙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체질적으로 나는 저녁잠이 많은 반면 새벽잠은 적다. 따라서 잠이 오면 드러눕고 잠이 깨면 공부를 하는 것이 순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보통 새벽 1시면 잠이 깨니까 남들이 곤하게 자는 조용한 시간에 홀로 일어나서 공부를 시작하면 날이 샐 때까지는 온전한 내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 버릇은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계속 되었는데 그때는 수학, 물리, 화학 과목의 숙제가 하도 많아서 연습문제를 푸느라 하루 4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언제나 잠을 실컷 자 보는 것이 소원이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밤을 지새워 본 적은 없다. 평소에 공부를 했기 때문에 시험 때라고 따로 밤샘을 하는 어리석은 짓은 아예 하지 않았다.
나는 직장을 퇴직하고 집에서만 생활하는 지금도 저녁 9시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들고 새벽 1시면 깨어나서 책을 좀 보다가 첫새벽에 배달되는 조선일보를 다 읽고 나서 다시 잠이 드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