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개혁

회고록 2019. 3. 13. 01:20

토지개혁

 

해방이 되고 토지개혁이 일어나자 토지 등기에 관한 대서업무가 폭주했다. 지금까지 대지주가 갖고 있던 모든 토지가 수많은 소작인들에게로 이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등기 관련 업무는 그때 대서소에서 했는데, 대서방을 차린 대곤 어른은 폭증하는 업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으며 그때 한 밑천을 단단히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경주에서 도정공장을 경영하여 큰돈을 모았고, 식량영단이라는 조직도 운영하였다. 거기서 모은 돈으로 논도 사고 밭도 사고, 과수원도 샀으며 박목월 선생의 아버지인 박준필 어른과 공동으로 건천읍 용명리 명장에 있는 넓은 산을 사기도 하였다. 

 

이대곤 어른이 주위에 인심을 잃지 않아 6·25 때 빨치산들이 내려와서 약탈을 할 때도 대곤 어른 댁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게 자기네들끼리의 지침이어서, 약탈도 당하지 않았다. 키도 후리후리하게 크고 후덕한 편이며 어려운 사람의 사정도 잘 알고 주위에 베풀 줄도 알며 주변에서 인심을 얻었었기에, 하도 주위에서 부추기는 바람에 국회의원에 3번까지 도전하다가 실패하였다. 

 

대곤 어른은 서면 수리조합 조합장을 거쳐 경주 수리조합장, 경북 수리조합 연합회장까지 역임하였다. 건천의 품산제 못과 송선 못은 대곤 어른이 조합장으로 있을 때 막은 저수지다. 

 

어느 해에는 경주에 심한 흉년이 들어 벼를 구해 와야만 식량을 하겠는데, 풍년이 든 문경, 점촌 지역에 가서 곳배(기차 화차)로 한 화차의 벼를 구해서 실어내려니까, 일본놈 당국에서 반출을 못하게 하더란다. 그래서 기지를 발휘하여 경주에 흉년이 들어 경주수리조합원들의 볍씨로 쓰기 위해 가져가야만 하겠다니까 두말 않고 반출토록 해 주더란다.

 

 

 

' 회고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족회의(1936 vs 1970)  (0) 2019.03.14
손목시계  (0) 2019.03.13
이대곤 어른(장인)  (0) 2019.03.13
드디어 아비가 되다  (0) 2019.03.12
여보, "랑해요!"  (0) 2019.03.11
Posted by 사투리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