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로만 걸어 마당에 一字가 새겨진… 그런 스님”
적명 스님 1주기 기념책 출간 “성철 스님만큼 지독한 독서광” 禪僧 17명이 말하는 수좌의 삶
조선일보
입력 2020.10.16 05:00
평생 참선 수행하며 후학들에 모범을 보인 전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 /유철주 작가
17개 퍼즐 조각으로 맞춰보는 수행자 적명(寂明·1939~2019). 최근 출간된 ‘적명을 말하다’(유철주 지음·사유수출판사)를 펼치면 드는 느낌이다.
적명 스님은 제주 출신으로 나주 다보사에서 우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평생 선방(禪房)에서 화두 참선에 몰두하다 봉암사 수좌로 수행하던 중 입적했다. 올해 1주기를 앞두고 나온 책에는 전국의 선승(禪僧) 17명이 자신의 시선으로 본 적명에 대해 증언했다.
동향(同鄕) 출신인 충주 석종사 혜국 스님은 경남 양산 비로토굴의 한 줄로 반질반질한 산책로를 기억했다. “오랜 기간 한 길로만 포행을 해서인지 마당에 반질반질하게 일(一)자 모양이 새겨진 걸 보니 적명 스님을 귀찮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바로 내려왔습니다.”
경북 문경 봉암사의 동방장 앞에 선 적명 스님. 함께 수행한 17명이 각자의 시선으로 본 적명 스님을 이야기한 책 ‘적명을 말하다’가 최근 출간됐다. /유철주 작가
성철 스님 제자인 원택 스님은 ‘(소문난 독서광이던) 성철 스님보다 빨리 책을 구해 읽으려 했던 스님’으로 기억한다. “새로운 공부 흐름에 관심이 많다 보니 스님이 해인사 열중을 보실 때 ‘내가 성철 큰스님보다 좀 더 빨리 읽어야지’ 하는 마음에 대구서점에 신간이 나오는 대로 보내달라고 해두었답니다.”
봉은사 주지를 지낸 명진 스님은 ‘토론가 적명’으로 기억한다. “적명 스님은 이론적이고 논리적입니다. 저는 단도직입 스타일인데, 스님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대하듯 자상하게 설명하시는 분입니다.” 심지어 명진 스님이 ‘불교에 갇히면 그곳이 바로 감옥’이라고 도발해도 적명 스님은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답했다. 이런 문답으로 밤을 새웠다는 것. 서울 상도동 보문사 주지 지범 스님 역시 ‘말이 통하는 리더’로 기억한다. 차근차근 설득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후학을 지도했다는 얘기다.
전 봉암사 수좌인 적명 스님의 마지막 산행 모습. /사유수출판사
도법 스님은 자리 욕심이 전혀 없던 모습으로 기억한다. “제가 생각할 때 적명 스님의 참모습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은, 대중이 아무리 원해도 ‘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조실(祖室) 말고 수좌(首座)로 있겠다’고 하신 일이라 봅니다.” 사찰에서는 수좌보다 조실이 더 높은 자리다. 한번은 도법 스님이 ‘스님의 현재 상태는 어떠냐’고 물었다. 대놓고 ‘깨달았느냐’고 묻는 듯한 도발이었다. 적명 스님은 ‘당근을 코앞에 매달아 놓은 당나귀 신세’라고 답했다 한다. “혀가 닿을락 말락한 당근을 먹으려는 욕심으로 죽기 살기로 힘을 더 내는 당나귀가 내 상태야. 조금만 더 하면 금방 당근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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