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학서(學瑞) 어른 

 

  할아버지의 휘는 소용(小用)이고 자(字)가 학서였다. 학서 어른의 모습은 진해 웅천의 외손인 안의구와 흡사하였다고 한다. 의구의 증조할머니가 학서 어른의 고모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증조부의 누이동생이 웅천의 안 씨 댁으로 시집을 가서 생긴 자손들이 길구, 의구 형제들이다. 따라서 학서 어른의 고종사촌 댁에서 태어난 사람이 의구인데 외손인 그가 외탁을 하고 태어나서 특히 학서 어른을 많이 닮았다고 했다.
  학서 어른은 얼굴이 좀 길고 광대뼈가 약간 튀어 나왔으며 구레나룻이 매우 무
성했다. 그 시절엔 사진을 남긴 어른들이 참 드물었기에, 웅천의 안의구 사진을 빌
려 와서 학서 어른의 생전 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오른쪽과 같다.
학서 어른은 젊어서부터 생선 장수를 했는데 이 장 저 장을 돌아다니다가 보니
까 경주 건천만큼 농토 넓고 수리시설이 좋은 지역도 드물어서 장승동에서 나주 임 씨와 보금자리를 틀고 살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월천 어른을 진해 형님 댁에서 12살 때 양자로 데려 오셨다. 용명리 2327번지의 오두막집은, 홍수가 크게 나서 앞각단에 있던 집이 통째로 떠내려 간 뒤에 옮겨서 지은 집인 동시에 우리 가계와 호적의 뿌리가 된 곳이다.


  용명리 2327번지의 집은 지금 형체도 없지만, 장승마을 뒷각단에 자리한 초가삼간이었다. 학서 어른 댁에서 종강 개울 넘어서의 앞집이 양동댁이고, 학서 어른댁 아래쪽에 골목이 하나 있고 그 옆이 부동댁, 그 옆의 오두막이 외가댁이었다. 학서 어른 댁을 기준하면 앞집이 사돈의 사돈인 양동댁, 옆의 옆집이 사돈댁이었다. 

 

  학서 어른은 51세 때인 1934년 8월, 5살 아래이던 부인을, 그 한 달 뒤인 9월에는 진해에 살던 형(운호)을 여의게 되자, 한 살 아래인 형수 나주 정 씨와 어린 조카들의 생활이 막연해지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큰댁 식구들을 모두 장승동에 합가할 것을 결정하였다. 학술은 1933년 당시 9살 때 이미 장승동 학서 어른 댁에 와 있었다. 학서 어른은 교육을 받지 못해 ‘집안에 글이 없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 하다가, 막내 조카인 학술이 10살이 되던 해에 건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때 학술의 나이가 입학적령기를 지났고, 일제강점기였던 관계로 입학 허가가 나오지 않자, 학교장과 담판을 벌여 결국 입학허가를 받아내기도 하였다. 

 

할아버지 학서 어른 2

  경주시 건천읍 장승길 14-13의 새집을 지어 뒤에는 ‘채전밭(텃밭)’을 두고 집 둘레에 감나무, 대추나무, 석류나무 등 유실수를, 또 사립 앞에는 해당화와 정자 좋은 홰나무를 심고, 울타리는 붉나무, 참나무, 가죽나무, 뽕나무, 골담초, 이죄피나무 등등의 생나무 울타리를 둘렀고, 1935년 4월 10일에 입주하였다. 당시 새집을 지을 때 학서 어른이 손수 통나무를 파서 만든 ‘재떨이’는 신갈 집에 있으니 길이 보존할 물건이다.


  학서 어른은 장차 태어날 손자 손녀들이 안방에서 부엌바닥으로 떨어질 위험을 염려한 나머지, 영남지방엔 일반적인 안방과 부엌 사이의 샛문을 내지 않는 등의 세심한 배려까지 하였다. 다만 아래채에는 방과 부엌 사이에 샛문을 두었는데 불행하게도 학술 숙부의 딸인 명숙이 방에서 재미나게 뛰어놀다가 샛문이 열리는 바람에 부엌으로 떨어져 쇠죽솥에 덴 적이 있다.


  학서 어른은 늘그막에 도시락을 들고 밀구 못에 가서 종일토록 낚시를 즐기곤 하였는데 기묘년 동짓달(양력 정초)에 건천 합동버스 정류장 부근에 있던 윤갑술네 주막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쓰러져서 집으로 모셔왔는데 회복하지 못하고 그길로 별세하였는데 향년 56세였다.


학서 어른은 손자인 내가 태어나자(1938. 12. 22.) 그렇게 뛸 듯이 좋아하였다고 한다. 1939년은 기묘년으로 크게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초상이 났을 때 상두꾼들은 모두 자기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고(보통 때 식사는 초상집에서 대접했음) 와서 상가를 도왔으며 장례 날에는 날씨가 무척 따뜻했다고 한다. 대한(大寒)보다도 더 추운 소한(小寒) 무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동리사람들은 학서 어른의 인심이 좋아서 그렇다고들 하였다. 학서 어른의 묘소는 밀구 들어가는 공동묘지에 있었으나 지금은
양포동서 새마실(용명3리)로 넘어가는 능선으로 이장하여 거기 언덕 꼭대기에 건천 들판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소재한다. 한동화 씨 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향으로 있다.


학서 어른이 시장에 가셔서 술을 한 잔 잘 자시고 오면, “얘들아 오늘저녁에는, (여름에 말씀이야) 모깃불을 잘 놓았다.”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모깃불을 잘 놓았다니? 술이 취했는데 모깃불을 잘 놓았다니? 무슨 말씀인지?’ “나(월천)는 몰랐어. 몰랐는데 또 겨울에 추울 때 술을 자시고 오면.”
“얘들아 오늘 군불을 잘 넣었다.” 해서 ‘군불을 안 넣었는데 군불을 잘 넣었다니? 무슨 말씀인지?’ “내(월천)가 못 깨달았단 말이야. 그런데 술을 잡수시니까 취한 김에 방이 뜨뜻한지 차가운지 모르고 잘 주무셨다. 그 말씀이야. 하하하하.” 이건 월천 어른의 학서 어른 회고담이다. 

 

  학서 어른은 가내가 화목하여 한 울타리 안에서 8촌들이 함께 살도록 하라는 말씀도 자주 하시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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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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