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에 나타난 비과학적 사례

김 주 석

1. 들머리

손꼽는 평론가들로부터 ‘우리 나라 사실주의 문학을 고착시킨 기념비적 명편’이라는 극찬을 받을 만큼 빼어나다는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볼라치면,

‘박물 시간에 청개구리를 해부하여 가지고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장을 차례 차례로 끌어내서......’

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미 정평이 난 이 작품에 대해 ‘냉혈동물인 청개구리의 오장에서 어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수 있느냐?’는 신랄한 비판이 가해졌다. 한 문학 평론가가 이 작품을 과학적인 인식에서 평한 이와 같은 예지와 안목은 우리가 중시해야 할 가치를 지닌다.

TV 드라마는 ‘가장 과학적인 기자재’를 동원하여 제작하는 종합예술로써 우리가 안방에서 손쉽게 문화적 체험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과학적’이라 함은 초감도의 광학기기와 사진화학, 녹음기술 등을 지칭하는데, 그렇게 첨단 과학기재로 제작된 영상과 음향이 과연 얼마나 과학적이냐 하는데 문제가 있다.

‘비오는 달밤에 단둘이 홀로 앉아......’라는 우스개를 시답잖은 소리라고 웃어넘긴 적은 있으나, TV드라마에서 맷돌이 역회전을 하든, AB형 환자가 혈액을 못 구해 소동을 벌이건, 칼을 소독한답시고 칼끝을 그을고만 있어도 되는 일일까? 이를 지켜본 도시 청소년들로 하여금 맷돌질이나 칼 소독은 본디 저렇게 하는 줄 믿게 하는 것은 스스로가 TV 유해론을 부채질하는 일일 것이다.

이 글은 TV 유해론의 기저의 하날 수 있는 드라마의 비과학적 실례를 살펴봄으로써 이런 병폐를 개선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하는 뜻으로 썼다.

이 글에서는 KBS ‘TV 문학관’ ‘아저씨의 훈장’ 편부터 ‘들 뻐꾸기’ 편에 이르기까지의 약 110 편을 눈여겨본 것 가운데 비과학적이다 싶은 것만을 몇 가지 골랐으며 그 밖의 몇몇 드라마에서 검색한 것도 추가했다.

2. 드라마에 비친 비과학적 사례

가. 멋대로 도는 농기구

레코드 턴테이블의 회전방향이 시계바늘이 도는 방향과 같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아는 세상인데 반하여, 회전축이 있는 전통적인 농기구나 가재도구의 회전방향은 그렇지 못한 듯하다.

‘할매 손은 약손이다’ 하며 배를 앓는 어린이의 배를 쓰다듬는 할머니의 약손은 언제나 시계방향으로 돈다. 할머니 손은 무턱대고 도는 것이 아니라 대장의 연동방향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으니, 선인들의 경험과학에 눈부신 데가 있음을 본다. 도리깨나 맷돌, 물레 등도 각각 그 회전 방향이 정해져 있는 법인데, TV에서는 그게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니 탈이다.

암수 짝을 마주 엎은 맷돌은 시계바늘과 반대방향으로 돌려야 정상이거늘 ‘TV 문학관’ ‘곰내’ 편에서는 시계바늘과 같은 방향으로 돌리고 있었다.

한편, 물레는 맷돌과는 대조적으로 시계바늘 방향으로 돌려야 하는 길쌈용구다. 그런데 물레질을 한도 끝도 없이 돌리기만 하는 물레(TV 문학관 ‘불’ 편)에 걸린 실은 덚어지다가 말고 끝내는 꼬여서 터지고 말았음 직하다. 이 물레질의 잘못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TV 문학관’ ‘병풍에 그린 닭이’ 편에까지 이어졌으며, 앞으로도 계속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특히 이 드라마에선 벽에다 바짝 붙여놓아야 마땅할 비좁은 오두막 방 한가운데다 물레를 차려 놓은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물레를 잣을 때 물레바퀴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RPM으로 계속 회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3가지 패턴의 다른 회전속도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매우 숙련을 요하는 작업이다. 즉 솜고치에서 실을 뽑아 내는 단계, 뽑아낸 실을 튼튼하게 덚는 단계, 그리고 덚어진 실을 물레 가락에 올리는 단계로 나누어진다.

일류 탤런트라면 사랑 놀음에 못지 않게 물레질 흉내쯤은 낼 수 있어야 한다. 연기자가 제대로 못하면 연출자라도 이를 지도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과학성의 문제가 됐건 고증의 문제가 됐건 간에 시정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참고로 축을 가진 전통기구의 회전방향을 살펴보면, 도리깨, 물레, 씨아, 풍구는 시계바늘 방향이고, 맷돌과 연자매는 시계바늘과 반대로 돈다.

나) 윗중방의 더운 공기

옛날에 저녁 마실을 갔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방에서 나와 댓돌에 내려설라치면, 처음에는 어둠에 눈이 익지 않아 미투리를 찾기가 어렵다. 이를 본 집주인은 호롱불을 윗중방까지 들어올려 신을 찾기 쉽게 댓돌을 비춰주곤 했는데, 이렇게 하면 바람이 여간 불어도 연약한 호롱불이 좀체 꺼지지 않았다. 이런 습속은 우리 조상들의 경험과 지혜의 샘에서 솟아 나온 것으로 그 속에 과학성이 내포돼 있다. 즉 이때 방안의 공기는 윗중방을 타고 천천히 나가는데 반하여 바깥의 찬 공기는 문지방을 타고 세차게 흘러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롱불을 윗중방이 아닌 데서 쳐들면 단박 꺼지고 만다. 그런데 병문안을 왔다는 사람이 늙은 병자가 누워있는 방문을 열어놓은 채 긴 얘기를 하고 있었으니 가관이다. (TV문학관, ‘아저씨의 훈장’ 편) 무거운 병에 걸려 누워있는 환자에게 문지방을 타고 드는 모진 찬바람을 한껏 쏘이게 하는 일은 병을 덧들게 한다. 옛사람도 터득하고 있었던 한옥구조의 여닫이문을 둔 이런 지혜를 현대인이 알지 못하는 것은 애처롭다.

다) NaCl과 KCl의 혼동

‘소디움클로라이드’라면 모를 사람도 있겠지만, ‘염화나트륨’이라면 그게 소금인 줄은 알법할 게다. 그런데 TV문학관 ‘배우수업’ 편에서 의사가 “링게르에다 염화나트륨을 섞어 주사하라”는 처방을 내렸을 때, 그 뜻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간호사가 비슷한 발음의 염화나트륨(NaCl)과 염화칼륨(KCl)을 혼동하여 소금물 대신 염화칼륨을 섞어 주사함으로써 환자가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하였다.

또 이 드라마에서는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를 안락사 시키기 위하여 염화칼륨을 용해시킨 황록색의 주사액을 환자에게 투여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설정이 있었다.

우리가 언뜻 듣기에는 매우 그럴듯한 발상이나 이 얘기의 허구성과 비과학성은 이러하다.

① ‘링게르액’이란 곧 생리식염수인 까닭에 염화나트륨을 섞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대관식을 치르고 자격증을 딴 간호사라면 염화나트륨(NaCl)과 염화칼륨(KCl)을 구별하지 못할 턱이 없다. 그리고 의사는 처방전에 화학기호를 쓰거나 원어로 쓰기 때문에 Sodium과 Potassium을 혼동할 수는 없다.

② 설사 간호사가 그 두 가지 물질을 혼동했다손 치더라도 이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생리식염수 용액은 제약회사에서 미리 조제하여 출하하지 병원에서 간호사가 일일이 섞어 만들 성질의 주사약이 아니다. 따라서 의사의 처방이나 간호사의 잘못으로 그렇게 조제했다는 설정도 설득력이 없다.

③ 비록 염화칼륨을 염화나트륨으로 잘못 알고 투여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치명적일 수는 없다. 즉 그 주사를 맞은 환자가 절명했다는 것은 이상하다.

④ 안락사를 시키기 위해 용해시킨 염화칼륨 용액이 황록색인 것은 사실과 어긋난다. 염화칼륨 용액은 무색이기 때문이다. 보기 좋으라고 주사약을 염색할 필요가 있을까?

⑤ 염화칼륨으로 안락사를 시켰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염화칼륨은 인체에 투여하는 치료약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립이나 정제 또는 주사약 형태로 병원에 공급하는 제약회사 제품도 있기 때문이다. 염화칼륨은 5%의 포도당이나 생리식염수에 혼합하는 주사약이기에 안락사에 이용될 수 있는 독극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염화칼륨은 고혈압 등에 이뇨제로, 또 저칼리 혈증(血症) 등에도 쓰이는 약품인데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문학작품을 창작할 때 작가가 혹시 유사음을 가진 화학물질의 혼동으로 인한 예기치 않은 결과를 플로트로 쓸 수는 있다. 그러나 잘못된 내용이 여과 없이 종합예술인 TV에 고스란히 도입되었을 때 결과적 증폭현상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으리요? 원작자나 연출자가 과학적인 사고를 게을리 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라) AB형 혈액의 수혈 소동

혈액형이 하필 AB형인데다가 백혈병을 앓는 어린 환자의 피가 모자라 수혈을 해야할 형편이 벌어졌다. (KBS 1TV ‘간호병동’)

그런데 그 소년이 수혈 받을 수 있는 피는 AB형뿐인데다 혈액은행은 물론 다른 병원에 아무리 연락을 해봐도 도저히 피를 구할 수 없다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때 마침 한 간호사의 피가 AB형이라 선뜻 헌혈을 해 준데 이어 어느 입원환자의 보호자도 AB형 피를 헌혈하기도 했지만 피는 계속 모자랐다.

그때 교통사고로 입원중인 한 젊은이가 자기도 AB형이라며 채혈해 줄 것을 자원했으나 환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 얼마나 인간성이 흘러 넘치는 이야기냐마는 문제의 초점은 인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과학성에 있다. 어떤 혈액형이든지 받을 수 있는 피가 AB형일 텐데 말이다. 그걸 혼동하다니?

마) 돛 달고 노 젓는 나룻배

한강에는 뚝섬, 한강진, 동작진, 삼개[麻浦], 서강 등의 무수한 나루가 있었듯이 수상교통이 발달됐던 조선시대에는 모든 강에 나루터가 많았고, 거기 있던 나룻배들은 돛대나 삿대 또는 노를 저어 강을 건넜다.

그런데 바람 한점 없는 날 나룻배에 축 처진 돛을 올린 채, 노를 저으며 강을 건너는 낭만적인 풍경이 세 번씩이나 반복되었다. (TV문학관 ‘분녀’ 편)

산들바람이라도 불었다면 또 모를까 그렇지도 않은데, 돛은 왜 올렸을까? 그 돛은 오히려 공기 저항만 높이는 방해물이 되어 가뜩이나 힘든 사공의 노를 더 무겁게 할뿐인 것을......

동요 속의 ‘반달’은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가 없이 잘도 가지만, 바람이 자는 강나루의 나룻배에 돛을 올리는 것은 무슨 헛멋일까?

바) 소독한다고 연기에 그을리는 칼

각각 다른 이유로 가출한 두 남자가 가을 산을 누비고 있었다. (TV 문학관 ‘두 나그네’ 편) 둘 가운데 하나인 의사가 뱀에게 물렸을 때 칼끝을 달구어 소독을 한답시고 낙엽을 긁어모아 불을 피우느라 시간을 지체한 것도 이상하다. 더구나 분초를 다투는 다급한 상황에서 겨우 피어오르기 시작한 낙엽 태우는 연기에 소독을 한답시고 칼끝을 그을린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그래 봤자 그을음이나 묻혔지 소독은 될 수 없을 터이다.

사) 절름발이 흉내의 오류

모든 연기자들이 촬영에 앞서 맡은 바 대본을 열심히 외워야 하듯이, 자기가 맡은 역에 걸맞은 연기를 연습하는 것도 상식이다. 그런데 바른 발을 절름거리는 역을 맡은 탤런트가 계단을 올라갈 때 첫발을 성한 왼발부터 먼저 내디딘 것은 이해할 수 없다. (TV문학관 ‘그 유월의 한낮’ 편) 지체가 부자유스러운 사람을 드라마에 등장시키는 일부터가 조심스러운 일인데, 그 걸음걸이마저 행동과학적인 측면에서 합리성이 결여되었을 때 장애인들이 받는 상처는 적지 않을 게다. 만일 내 말이 미덥지 않으면 직접 한번 절름거려 보시라. 어느 발부터 내디뎌지는지? 또 ‘토지’에서는 다리에 총상을 입은 ‘지 서방’이 앞머리에선 왼발을, 끝머리에선 바른 발을 번갈아 절름거리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 탤런트는 자기가 어느 발을 절름거리는 역할인지조차 잊었나 보다.

아) 거미줄과 거미 새끼

우리 주위에 거미만큼 분포밀도가 큰 동물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농촌에 가면 벽이나 서까래 밑에 거미줄을 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런 거미줄을 두고 아이녀석이 “거미줄을 치우면 새끼 거미는 죽고 말아요.” 라면서 거미줄을 걷지 못하게 하는 대목이 있었다. (TV문학관 ‘거미의 집’ 편) 여기서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거미줄과 거미 새끼의 생사관계다. 비록 거미줄을 누가 걷었다 치더라도 해거름이 되어 왕거미가 새집을 짓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고, 또 새끼 거미는 어미를 떠나 한 마리씩 뿔뿔이 흩어져서 사는 속성이 있어, 거미 새끼와 어미의 거미줄 사이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새끼 거미는 제가 필요한 거미줄을 뽑을 수 있는 개체다. 그런데 왜 그런 대사가 나왔을까? 생태적으로 당위성이 없는 내용을 다루는 것은 곤란하다.

TV에서 방영한 비과학적 사례가 어찌 위에 열거한 것들뿐이랴. ‘억새’를 두고 ‘갈대’라 이르거나 ‘황새’와 ‘학’을 뒤바꾸는 예는 KBS나 MBC가 반복해서 범하는 혼동이요, 이밖에도 일일이 예시하자면 많겠지만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 했고 그 역도 진이므로 이만 그치기로 한다.

3. 마무리

오늘날은 사회가 지나치게 미분화로 치닫는 성향인데, 이런 환경 밑에서 다원화된 것을 일원화시킨 예술품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 TV 제작진의 노고에 존경을 보낸다.

이런 말은 하는 필자의 변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매우 우수한 작품을 제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고,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속담의 뜻을 되새겨 주기를 바라는 충정에서다.

앞에서 예시한 것 가운데 KCl 이외의 문제란, 전문성을 요하지 않는 사안들이다. 따라서 ‘동물소리 효과음의 오용 실례’에서도 지적했듯이 성실한 주의만 기울이면 충분히 반복 오류를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교양 프로그램 시간에 ‘형상기억합금’이니 DNA 구조 등 첨단과학을 논의하던 TV가, 드라마에서는 비과학적인 내용을 방영하는 모순은 고쳐야만 된다. 문학작품을 영상화시키므로 써 원작의 높은 예술적 값어치를 빛내 주어야 마땅할 TV가 그 가치를 반감시키는 것은 원작에 누를 끼치는 결과다.

현대 사회를 선도하고 국민을 계도하는 것이 TV가 할 일이라면, 이를 위해 앞서가는 지성이 추구해야 할 것은 미분화된 각 분야의 조화로운 총합이며, 영상과 음향이 철학과 과학과 심리학적인 바탕 위에 서게 함으로써 꾸며진 드라마가 아닌 현실처럼 믿게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드라마라야만 많은 시청자를 한껏 감동에 젖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방송심의 1987. 2. 제 68호 p18-23 방송위원회.방송심의위원회

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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