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 비친 동물학대 사례
김 주 석
1. 들머리
근간에 우리의 자연과 야생 동물의 생태를 밀도 있게 찾아 엮은 TV 다큐멘터리 작품이 쏟아지고 있는 것은 퍽 고무적인 현상인 바, 그 제작진들의 노고에 뜨거운 박수와 성원을 보낸다. 더구나 VCR의 보급이 확대됨으로써 이들 자연에 대한 ‘자료성 프로그램’이 일과성을 넘어 한층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된 것도 좋은 일인 동시에, 이점이 또한 제작진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킬 듯하여 더욱 반갑다.
단지 ‘살아 있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동물은 사랑 받을 가치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동물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생존 수단으로써 행하는 수렵활동은 예외로 치더라도, 예로부터 우리는 제발로 집안에 뛰어 들어온 노루나 꿩들은 고스란히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풍속을 지켜온 민족으로서 동물 사랑을 종교처럼 숭상해 왔다.
그런데 품격 있는 다큐멘터리 작품과는 대조적으로 TV 드라마나 교양 프로그램에서 동물을 학대하거나 잔인하게 살육하는 장면까지 속출하는가 하면, 내용이 생태학적 견지에서 보면 도무지 아귀가 맞지 않는 예도 흔히 있음을 본다. 동물에 대한 TV의 잔혹 행위도 보기에 딱하지만 이로써 시청자까지 간접적으로 가학하는 예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사랑스런 동물에게 TV가 애꿎은 고통을 주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그런 잘못을 이대로 방치해도 좋은 일인가? TV 제작진들 사이에 질펀하게 깔려있는 동물 학대나 시청자를 간접 가학하는 병폐가 왜 당연시되고 있는지 필자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남들이 흉을 볼까 두려운 부정적인 측면을 여기 들추어내는 것은 이런 유형의 오류가 앞으로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충정에 바탕을 둔 것이며, 그것이 선뜻 내키지 않는 이 글을 쓰는 기본 취지다.
이 글은 약 3년 동안에 걸쳐 우리 TV에서 방영된, 뉴스, 드라마, 교양 프로그램 등을 바탕으로 필자가 특히 눈 여겨 지켜본 것 가운데서 동물에 관하여 크게 눈에 뜨이는 대표적인 것만 검색해내어 그 오류를 지적함과 더불어 개선 방안을 모색해 보려는 뜻에서 쓰여졌다.
2. 동물에 관한 잔혹 사례-천대받는 동물들
가) 실에 묶여 바동거리는 아기 종다리
급속한 산업화와 병행하여 배출가스, 산업폐수, 농약살포 등등으로 말미암은 공해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야생조수의 숫자도 크게 줄어들고 있는데,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현상이 바로 제비와 종다리 등의 개체수의 감소다. 영국만 하더라도 자연 애호가들이 종다리나 찌르레기와 같은 야조를 종류별로 구분하여 어느 지역에 몇 만 쌍이 서식하고 있는지를 해마다 조사 보고하고 있는 걸 볼라치면 우리로서는 부럽기조차 하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지금 종다리가 과연 몇 쌍이나 둥지를 틀고 있을까? 신라 효공왕*은 정기적으로 성안에 있는 까치집의 수를 보고케 했고 최근 일본 규슈에서조차 까치 통계를 발표한다던데 우린 도무지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어쨌건, 희귀해진 종다리의 문제를 그들이 한창 번식하는 계절에 때를 맞춰 취재 대상으로 삼을 것까진 매우 반가운 사실인데, 그 보도 방법이 좀 치졸했다.
“종다리가 희귀해져 가고 있다.”는 명제를 공해와 연결시켜 풀어나가는 리포터의 설명과 함께, 화면에 비친 것은 엉뚱하게도 다리에 실이 묶여 바동거리고 있는 아기 종다리의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KBS 1 TV 저녁 9시 뉴스, 부산 KBS 제작)
줌렌즈나 망원 카메라는 어디다 두고, 하필 솜털이 보송한 종다리를 꽁꽁 묶어둔 채 영상에 담으려 했는지 지켜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애달픔을 느끼게 했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번식기의 동물을, 그것도 어린 새끼를 괴롭히는 것은 금물이며 이건 자연보호 정신에도 어긋난다.
나) 죄 없이 헬리콥터에 쫓기는 젖소
밝아오는 6월의 상쾌한 새아침에 TV 카메라를 실은 헬리콥터는 제주도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이국풍의 감귤 밭과 시원한 폭포 등의 풍물은 초여름을 맞는 시청자의 눈을 싱그럽게 해 줬는데(KBS 1 TV, 아침 7시 뉴스) 마지막 장면에서 헬리콥터가 젖소 무리가 풀을 뜯는 상공에서 고도를 한껏 낮추는가 싶더니 급선회를 하며 갑자기 무리진 소떼들을 재미난 듯 뒤쫓고 있었다. 조종간을 잡은 사람이나 카메라맨이야 신바람이 났을 테지만 쫓기는 ‘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슬 젓은 풀잎의 향긋함에 취해 한가롭게 풀을 뜯는 중이었는데 느닷없이 하늘에서 나타난 괴물 같은 헬리콥터가 천둥치는 소리와 함께 덮치듯 내려 박히며 자기 꽁무니를 추격해 왔을 때 얼마나 당황했으랴! 오죽하면 그 소 떼는 방향감각마저 잃은 채 죽을힘을 다하여 전속력으로 뿔뿔이 모둠발로 뛰었을까?
그 수십 마리의 소 무리 가운데는 임신 중인 암컷도 섞여 있음 직한데, 그렇게 혼비백산을 하고도 뱃속의 송아지가 유산되지 않았을까 의심스럽다. 가축은 물론 야생동물도 뜻하지 못했던 것에 크게 놀라고 보면 유산은 물론 생육에 엄청난 지장을 받는 법이다. 즉 암탉은 알을 낳지 않고, 젖소는 젖이, 비육우는 성장이 일시 정지되거나 병에 걸리기도 한다. 만일 다른 나라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면 젖소의 채유량 감소 등등을 놓고 보상에 대한 엄청난 시비가 거론됐을 성싶다. 마치 아프리카의 밀림을 누비는 밀렵꾼이나 저지를 법한 행동을 예사롭게 연출하는 이런 일은 부디 반복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인데, 불행스럽게도 제주도의 소와 말이 헬리콥터의 추격을 받은 일이 재현되었으니(KBS 1TV, 저녁 9시 뉴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다) 출연자에게 밟혀죽은 오골계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정도를 넘어, 아주 공개적으로 밟혀죽은 동물도 없지 않다. 일요일 아침에 방영된 KBS 1 TV '출발 동서남북' 보은 편에서는 천연 기념물인 오골계를 법주사 입구의 잔디밭에 풀어놓고 닭의 수보다 많은 수의 출연자들로 하여금 오골계를 한 마리씩 붙잡아 오게 하는 게임을 벌였는데, 그 게임의 벌칙이란 것이 미처 닭을 잡지 못한 출연자를 탈락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오골계들이 순종인 천연기념물이냐, 아니면 잡종이냐는 차치하더라도 닭으로서는 생명이 걸린 일임에도 불구하고, 게임에서 탈락되기 싫은 악착같은 출연자들이 서로 닭을 잡으려고 우왕좌왕 밀치기를 했는데, 결국 무참하게 밟혀 죽은 오골계를 한 출연자가 쳐들어 보이는 애처로운 순간까지 가위질 없이 방영되어 뒷맛이 영 개운찮다. 이 장면을 지켜본 아이들이나 부녀자들의 충격은 어떠했을까? 이건 생명의 존엄성 자체를 무참히 짓밟는 처사로서 시청자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한 좋은 예다. 그것이 녹화 프로그램인데도 불구하고 편집할 때 이를 간과했다는 것은 대중매체가 갖추어야 할 양식의 문제이며 이로 인한 교육적인 역효과는 여기서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라) 코뚜레가 쳐 들린 채 끌려가는 소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속담 속에 나오는 ‘경마잡이’는 언제나 말의 덜미 부근에 붙어 서서 말과 함께 걷는 것이 관례인 반면, 소는 항상 뒤에서 몰지 앞에서 끌지 않는 게 일반적인 습관이다.
그런데 ‘TV 문학관’ ‘한라산’ 편에서는 소의 앞쪽에서 억지로 끄는 사람 때문에 코뚜레가 쳐 들린 소는 아픔을 참는 듯 목을 길게 뺀 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으로 주춤거리고 있었다. 소는 덕성스러운 가축이요, 인종(忍從)의 동물이어서 뒤에서 점잖게 몰면 자연스러운 발걸음을 앞으로 옮겨놓는 짐승이건만, 거기서 왜 그렇게 앞에서 마구 끌어 소에게 괴로움을 줌으로써 시청자들의 손을 오그라들게 했는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이러한 오류가 ‘TV 문학관’ ‘불’ 편에서 또다시 반복되고 있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마) 가랑이가 찢기는 억지 춤을 추는 개구리와 닭
양서류의 무미목에 속하는 개구리를 두고 인간들은 하기 쉬운 말로 ‘미물’이라 한다. 그런 인간 가운데 ‘TV 문학관’ ‘불새’ 편에서 주인공은 하릴없고 권태로운 자기 시간을 죽이기 위하여 죄없는 개구리를 붙잡아다가 노리개 삼아 희롱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개구리의 앞발을 양손으로 집어들고 박자에 맞춰 가랑이가 찢어질 듯한 억지 춤을 추게 하는 모습은 보기에 민망하였으며, 그런 행동을 하는 그 주인공의 모습이 추잡하게 여겨졌다.
아무리 미물이라 할지라도 TV에서 산 개구리에게 가랑이가 찢어질 듯한 아픔을 강요하는 것은 잔혹한 짓이다. 그렇게 동물을 괴롭히는 화면이 담긴 전파를 다중(多衆)을 상대로 마구 쏘아대어도 좋을까?
위에 든 예의 개구리가 닭으로 바뀌어 재판(再版)으로 나온 것이 MBC TV ‘청춘 만만세’였다. 털을 몽땅 뽑힌 채 징그러운 알몸인 닭의 활개를 움켜쥐고 서툰 체조를 시키는 어느 코미디언의 치기는, 그게 비록 산 닭이 아닐지라도 보기에 대단히 거북했다.
바) 청각기능을 박탈당한 산토끼
함박눈이 퍼붓던 날 동네 젊은이들 몇몇이 모여 토끼 몰이를 할 때, 놓친 토끼의 수가 잡은 토기의 수보다 많다는 것쯤은 많이 경험해 본 일일 게다. 필자도 혼자서 살찐 황구와 함께 단숨에 수 킬로미터씩 산토끼를 뒤쫓다가 허탕친 일이 허다했다.
산토끼는 방향전환시의 급회전 및 교묘한 은신술과 함께 그 질주력 또한 대단하여 준족의 개를 따돌리는 천부적인 소질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큰 귀에 걸맞을 만큼 기막히게 발달된 청각을 갖춘 야생동물이다. 그것은 산토끼가 자연계의 먹이사슬의 맨 아래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조물주가 점지해 준 바탕성의 체질 즉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랄 수 있다.
그런 산토끼를 ‘TV 문학관’ ‘물레나물 꽃’ 편에서는 잠든 병아리를 잡듯이 맨손으로 답삭 붙잡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비록 드라마가 아무리 허구의 세계라 손치더라도, 야성의 토끼를 꽃잎에 앉은 나비 잡듯이 잡는 것은 자연과 야성을 가볍게 본 결과인 바, 이로 인한 교육적인 역기능은 엄청날 것이다. 아마도 그건, 산토끼와 털빛이 닮은 집토끼일 성싶은데, 모가지가 아니라 귀가 커서 슬픈 산토끼의 청각을 인위적으로 박탈함으로써 허수아비를 만드는 등 동물에 대한 이해를 오도할 소지가 있는 내용이라 우리 청소년을 바보로 만들 우려가 높다.
사) 죽어간다는 누명을 쓴 멀쩡한 송아지
예로부터 ‘천석꾼 살림에도 소가 반 살림’이라 했듯이, 드라마의 내용 가운데는 농가에서 귀하게 여기는 소가 병에 걸리는 수도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KBS 1 TV ‘대관령’ 편에서는 병이 들어 죽어 가는 송아지를 둔 농민들의 애타는 심정을 그리려고 했는가 본데, 역설스럽게도 화면에 비친 송아지는 건강미가 철철 흘러 넘치고 있었으니 가관이었다.
병든 동물은 눈이 게슴츠레하고 눈언저리에는 눈물 자국과 눈곱으로 지저분하며 털이 까슬하고 코끝이 마르는 게 상식인데, ‘대관령’ 편에 비친 송아지의 코끝에는 윤기가, 눈에는 총기가 그리고 털빛에는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었는 바, 눈이 화등잔 같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송아지에게 죽어간다는 누명을 씌운 것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더욱 이런 ‘억지 연출’이 KBS ‘청소년 문학관’ ‘은하의 꿈’ 편에서 또 다시 재탕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자성할 일이다.
상기 사례는 동물에 대한 천대로서 비록 현재적(顯在的) 잔혹성을 노정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를 내재하고 있기에 예시하였다.
아) 주검이 살육보다 처참한 멧돼지
이런 유형이 어찌 위에서 예시한 것뿐이겠는가? 추적 사냥의 제물로서 처절하게 최후를 맞은 멧돼지의 죽음은 아예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라 체념해 두기로 하자. 다만 뒷맛을 위해 꼭 가위질을 했음직한 끝 부분, 즉 피를 흘리며 죽어서 혀를 길게 빼문 멧돼지의 처참한 모습인 그 주검까지 비춰 준 ‘MBC 뉴스데스크’의 카메라가 베푼 과잉 친절은 시청자에 대한 간접적 가학행위로 여겨질 정도였다.
위에서 보기를 든 것 이외의 사례들은 그만 덮어두는 것이 좋겠다. 그건 너무 지나치면 모자람만 같지 못하니까. 다만 KBS 1 TV ‘방송과 인간’ 편에서 폭력 장면을 시청한 어린이가 매우 공격적인 성향을 나타낸다는 이른바, ‘반두라의 폭력 실험’이 시사한 바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점만 첨언해 둔다.
3. 마무리
앞 장에서 예시한 실례에서 본 바와 마찬가지로, TV에서 학대받다가 살육된 동물의 수는 적지 않다. 코미디에 쓰인 고약한 말들이 유행어가 되어 청소년 사회에 산불 번지듯 하는 예는 흔히 보아 왔듯이, 고명한 학자들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TV가 청소년에게 미치는 교육적 효과는 대단한 것이다.
어느 날은 더러운 개울가에 버려진 채 죽어 가는 쓸모 없는 수평아리들의 처참한 몰골을 통해, 몰인정한 부화장 사람들의 교지(巧智)를 힘주어 고발하던 TV에서, 순진무구한 동물들을 괴롭히는 장면을 여과 없이 방영하는 것은 곤란하다. 어린이들이 높은 곳에서 병아리를 날린 다음 바닥에 떨어져 죽게 하는 게임을 함부로 벌이는 것과 TV에서의 동물학대 사이에는 어떤 개연성이 없을까? 나아가서 사회 교육적 차원에서라도 생명의 존엄성을 가볍게 여기거나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잔혹한 장면은 편집시에 가위질을 아끼지 말았으면 한다. 또 어떤 이유에서건 TV에서 동물을 인간의 유희 도구로 삼는 일은 정당화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들 오류에 대한 개선 방안은 오로지 한 가지.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는 길밖에 없을 듯하며, 졸속 제작을 피하고 좀 진득하게 시간을 가지고 제작하는 슬기가 필요하다.
‘동물소리 효과음의 오용 사례’에서도 지적했듯이, 전체는 부분의 집합이요 부분은 전체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이다. 작은 것 즉 죄 없는 동물들을 더 이상 학대하지 말았으면 한다. 여기서 자연보호헌장의 거룩한 뜻을 들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휴지 나부랭이나 줍는 것이 자연보호라는 차원을 한층 승화시켜, 우리 TV가 생동감 있게 값지고 품격 있는 ‘자료성 작품’을 양산하는 실질적인 자연보호와 동물애호 사업에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해 줄 것을 기대해 본다. 사디즘을 통해 희열을 찾는 제작진은 없을 것이라 믿으니까.
방송심의 1987. 6 제 72호. p23-27 방송위원회.방송심의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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