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의 암수 대응 [pot vs. put] 연구

女根谷와 玉門池’를 중심으로

김 주 석

1. 들 머 리

점잖은 이들은 성(性)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으나 유성생식을 하는 고등생물계에게 있어서 성은 곧 종족 번식의 절대 수단으로써, 생명에 버금가리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성(性)은 곧 생산과 풍요의 상징이기에, 다산(多産)한 여인으로 하여금 유방을 내놓고 밭에다 씨앗을 뿌리게 하면 풍작을 거둔다는 민속조차 채집되고 있다. 이 글의 제목부터가 조금은 외설적이란 견해를 가질 수도 있으나, 글의 내용에 대한 외설 여부는 독자들의 평가에 맡기려 한다.

7 세기 중엽, 서라벌에서 한 스님이 큰 소리로,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 줄 사람은 없는지요, 그로써 하늘을 괴일 기둥을 깎으리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하며 염불인 듯 노래인 듯 외치고 다녔단다. 그 스님이 누구인고 하니, 속성은 설(薛)씨요, 아명은 서동(誓憧)이었으나 출가하여 대오각성한 원효대사다.

대사의 소문을 전해들은 무열왕이, 속으로 이 해괴한 노래를 가만히 풀이해 본즉슨, 도끼란 자루를 끼워야만 쓸모가 있는 연장인데, ‘자루 빠진 도끼’란 여성의 심벌을 상징하니, 자루란 곧 남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은유적인 표현 속에 함축된 뜻은 다름 아닌,

“과부를 얻어 나라의 기둥이 될 큰 인재를 낳겠노라”고 공개적인 청혼을 하는 내용이었다. 여기까지 해석하다가 생각이 미친 무열왕은, 신하에게, “곧 바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인도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이때 마침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던 대사는 일부러 다리 아래로 떨어져 옷을 흠뻑 적셨으니, 곧장 요석궁으로 인도됐을 밖에...... 하여, 젖은 옷을 말린답시고 퍼질고 앉을 핑계를 얻은 원효대사는 거기서 유숙하다가 필경 홀로 지내던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위의 얘기는 삼국유사에 실린 한 대목인 바, 속세의 필부필부(匹夫匹婦)는 물론 도통한 스님까지도 음양의 이치를 따를진대, 하물며 지형엔들 요철(凹凸)이 없으며, 땅이름엔들 암수[雌雄]가 없을까 보냐.

이 글에서는 땅이름의 암수 대응 가운데 특이한 경주 옥문곡(玉門谷=보지산)의 [pot]과 이를 마주하고 있는 ‘불멧등’의 [put] 및 ‘보지산’ 부근에 있는 ‘오:미-못’의 말밑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2. 땅이름의 암수 대응 실례

우리 나라의 땅이름 가운데 음양에 관한 것도 많고 암수가 대응되는 곳도 적지 아니한데, 먼저 암수대응의 예를 보면, 전북 진안에 있는 기봉(寄峰)으로 암말의 귀와 수말의 귀처럼 마주 솟아 있는 ‘마이산(馬耳山)’을 들 수 있다. 또 전남 여수시 삼산면 동쪽 해상의 하백도에는 ‘각시바위’에 대응하는 ‘서방바위’란 것도 존재한다. 반면,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에는 남성의 상징인 ‘남근암(男根岩)’은 있으나 그에 상응하는 존재가 없는가 하면, 전남 여수시 중흥동엔 얼마 전까지도 ‘각시바위’가 있었으나 부근에서 그에 대응되는 땅이름을 찾지 못하였다. 전국적으로 남성의 상징은 비교적 흔한 편이지만 여성의 심벌은 상대적으로 적으며, 더욱이 땅이름에 암수가 대응되면서 마주하는 곳은 드문 편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성신앙’에 관해 살펴보고 지나가기로 하자. 인간은신석기 시대 이래로 생식기 형상의 자연물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왔으며, 이처럼 생식기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성신앙(性信仰)이라 한다. 전국 도처에 흩어져 있는 성석문화(性石文化)의 유적을 살펴볼 때, 남근석(男根石은) 지역에 따라 총각바위, 서방바위, 아들바위, 송곳바위(전남 순천시 월등면 대평리 화지마을), 선바위, 자지바위, 심하게는 좆바위(전남 여수시 삼산면 덕촌리, ‘좆바구’)라 부르고, 여근석은 요강바위(전남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각시바위, 치마바위, 밑바위, 보지바위라 일러 오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바위뿐만 아니라 남녀의 성기를 닮은 지형에다 수복강령과 소원성취를 빌어왔는데, 이런 무속문화(巫俗文化)는 민족의 심성 밑바닥에 짙게 깔린 기층 문화의 하나랄 수 있다. 굿은 샤먼이고 샤먼은 무(巫)요 무는 곧 신정일치(神政一致) 시절부터 자연인 하늘과 통했기에 우리 생활 속에 내림으로 이어져 온 습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신앙은 비단 우리 나라에서만 숭상되어 온 것이 아니라, 가까이는 일본 오키나와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의 태국이나 인도네시아는 물론 남태평양에 떠있는 폴리네시아 섬들에서조차 성신앙의 유적이 발견 될 뿐만 아니라, 멀리는 마야문명의 중심지였던 페루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음을 본다.

사람 생식기 모양의 성석이 없는 지역에서는 일부러 나무로 남자의 성기 모양을 다듬어 놓고 숭배하기도 했는데,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신남리가 그 좋은 보기라 할 수 있다. 남근석과 여근석은 풍농과 풍어, 자손의 번영과 더불어 각종 전염성 질병과 기아 및 풍수해 등 자연 재해로부터의 액막이 구실을 해왔다. 따라서 성석(性石) 부근의 마을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 영험함을 의심하지 않았으나, 오늘날에 와서 성(性)은 진부한 것 또는 성은 외설적인 것으로 낙인 찍혀 성신앙 자체를 일종의 기속(寄俗)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짙어졌다. 그러나 성석이나 성기 모양의 지형이 있는 마을에서는 그런 곳을 신역(神域)으로 섬기면서 좋은 날을 받아 제사를 지내거나 굿을 벌이는 것쯤 쉽사리 목격할 수 있다.

위에서 얘기한 바위 이름과는 달리, 남녀의 성기(性器) 이름을 땅이름에 적나라하게 붙여진 곳이 있으니, 그건 경북 경주시 건천읍 신평리 ‘오봉산’ 기슭에 있는 ‘보지산’이 그 한 예인데, 이곳은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機三史)1)의 하나와 관련된 ‘여근곡(女根谷)’이란 곳이다. 그곳이 어디쯤이냐 하면, 서울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영천(永川)을 지나면, 머지않아 ‘경주 터널’을 지난다. 이 터널을 빠져 나오기 바쁘게 오른쪽 차창 밖을 내다볼라치면, 그 자태가 ‘도끼 자국’ 정도가 아니라 여성의 국부와 너무도 닮아 차마 쳐다보기가 민망스러우리 만큼 대음순, 소음순은 물론 음핵(陰核)과 질구(膣口)까지 적나라한 형국의 산이, 입조차 반쯤 벌린 채 앉아 있음을 본다. 이 산의 은밀한 골짜기에는 사시사철 샘이 솟는데, 그 샘엔 동리 사람들이 남정네의 출입을 불문율로써 금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누가 거기 들어가서 작대기로 휘저으면, 마을 처녀에게 횡액이 미친다고 전해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도임 길의 경주 부윤은 이 산을 보면 재수가 없다하여 지름길을 두고도, 영천에서 ‘시티재’를 돌아 경주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광복 전에 서면사무소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그게 다 무식한 조선 사람들의 미신이라"던 일본인 산림주사가 이 산의 나무들을 함부로 벌목한 뒤 사흘만에 급사했다는 것은 이 산에 얽힌 뜻 있는 실화인 동시에, 이 산의 영험함을 입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울산의 ‘남근암’은 그 형상이 남성의 심벌과 같은 까닭에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긴 마을 장정들이, 어느 날 그걸 칡으로 동여 넘어뜨리려 하자, 난데없이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치는 이변이 생겨 모두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엄숙한 자연적 존재에 대해 인간이 함부로 도전하는 것을 자연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우연치고는 어딘가 묘한 일면이 없지 않다.

각설하고, ‘여근곡’에 관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가운데 ‘지기삼사’1)의 하나인 선덕여왕 5년 5월 조의 기록을 보면 이러하다.

요석 공주가 설총을 잉태하기 얼마 전인 서기 636년, 두꺼비와 개구리가 떼를 지어 궁성의 서쪽 옥문지로 모여들어 삼사 일 동안 요상스레 우는 이변이 발생했다. 이 보고를 받은 여왕이 신하들에게 명하기를,

"두꺼비와 개구리의 성난 눈은, 군사의 상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일찍이 서남쪽 변두리에 옥문곡이란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들의 징조를 보건데 반드시 백제의 군사들이 몰래 그곳에 침입해 숨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면서 곧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이를 수색하여 토벌토록 하였다. 장군 알천 등이 날쌘 군사 2천을 이끌고 부산(富山) 밑에 달려가 보니, 과연 여왕의 말과 같이 백제 장군 우소(宇召)가 독산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5백 명의 군사를 데리고 여근곡까지 와서 복병을 하고 있었다. 장군 알천 등은 적을 쳐서 섬멸하였다.

그런 다음에 신하들이 여왕에게, 어떻게 그런 예측을 할 수 있었던가를 여쭈었더니, 여왕이 일러 가로되,

"옥문은 곧 여근(女根;보지)이라 음(陰)에 속하고, 그 빛깔은 흰데, 흰빛[白]은서쪽 방향을 나타낸다. [玉門=女根=陰→白=西方]. 이로써 서쪽의 옥문곡에 백제 군사가 매복해 있을 줄 알았고, 병사들이란 남자인 고로, 남근(男根)이 여근(女根) 속에 들면 필경은 죽고 마는 법...... 따라서 거기 매복한 백제 군사는 어렵잖게 소탕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다."고 하였다.

이 ‘옥문곡’ 즉 ‘여근곡’을 현지에선 입말로 점잖게 여자산(女子山) 이나 소문산(小門山)이라 하나 어른들은 물론 짓궂은 초동들까지 함부로 ‘보지산’이라 부르며, 때로는 소산(蘇山)이라고도 하는데 그 앉음새는 동쪽을 향한 채 어쩌면 떳떳하기조차 한 것 같다.

이 곳을 지나던 어느 옛시인이 살펴본즉, 적병이 숨을 만치 깊은 산골도 아닌고로 사기의 기록이 조금은 미심쩍은 듯 시를 읊어 가로되,

淺谷何能伏敵兵, 玉門天載曼爲明, 居民爭說知機事, 空使元戎秘道行

(얕은 골짜기에 어찌 능히 적병이 복병했으리오, 옥문이란 이름만 천년을 두고 헛되었네, 백성들은 지기(憤)한 바를 다투어 일컬어, 공연히 장수들로 하여금 숨어 다니게 하네)2) 하였다.

1) 지기삼사(知機三史)란 이 밖에도, 여왕이 당나라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을 보더니 향기가 없을 것이라 예언한 것과, 건강할 때 미리 자기가 죽을 날을 예언하며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는 것 등의 3 가지 일화를 말한다.

2) ‘보지산’ 그 자체는 깊고 큰산이 아닐지라도, 그 산이 등을 기댄 오봉산은 다름 아닌 부산성(富山城)의 일부이기에, 백제군이 숨었던 곳은 ‘보지산’이라기 보다 부산성(富山城) 그 자체거나 그 일부인데 기록을 할 때 그만 여근곡이라 썼다고 보아야 마땅할 듯하다.

은행나무도 마주봐야 열매가 열리는 법이고,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 것이 음양의 이치인데, 보지산의 맞은 편 지형과 땅이름은 어떠할까?

3. ‘오미못’과 ‘옥문지’

이 ‘여근곡(女根谷)’에 관한 기록은 여러 출판물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테면:

① 건설부 국립지리원 <지명유래집>, 1987. 212쪽

"지형이 누워 있는 여자의 국부처럼 생겨서 붙은 지명이다. 골짜기 아래의 연못은 옥문지(玉門池)라고 하는데, 이 근처 사람들이 오봉산을 ‘보지산’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3)

② 김기빈, <한국의 지명유래> 1986. 106쪽

"건천읍 신평리 오봉산 골짜기에 여공골(여근곡)과 오미기(옥문지: 玉門池)라는 곳이 있다." 4)

③ 한국의 여로 6, <경주>, 1984, 265쪽

"여근곡 중앙에 옥문지(玉門池)라는 샘이 있고, 출입금지의 민속도 있다." 5)

3) 골짜기 아래 옥문지란 연못이 없을 뿐더러 오봉산을 가리켜 ‘보지산’이라고 부르는 법이 없다.

4) 오봉산 골짜기에 ‘여공골’이란 땅이름이 없고, 오미기못과 옥문지는 전 혀 같을 수가 없다.

5) 여근곡 중앙엔 옥문지란 샘이 존쟈하지 않는다.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 제 7권 212쪽에 보면 ‘오미-못’란에, 위에 말한 여근곡 전설과 함께 ‘오미-못’이 바로 ‘옥문지’인 것처럼 함부로 적고 있는데, 글쓴이의 견해와 몇 가지 측면에서 다른 점이 있기에 여기서 밝혀 두고자 한다.

첫째, ‘오미-못’과 ‘옥문지’는 전혀 다른 곳에 위치한다.

삼국사기에는 "개구리 떼가 궁성의 서쪽 옥문지로 모여들어 [...宮西玉門池...]라 했고, 삼국유사에는 "영묘사의 옥문지에서[...於靈廟寺玉門池] 겨울인데도....."라 적고 있으니, 어느 기록이거나 ‘옥문지’의 위치는 궁성에서 비교적 가까운 영묘사 경내에 있던 것으로 봐야 마땅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터는 오늘날 경주시 서천 철교 또는 오능 부근이기에, 경주에서 무려 20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오미-못’의 위치와는 너무나 동떨어지다. 만일 ‘오미-못’이 ‘옥문지’라 손치더라도 ‘소산’과 ‘오미-못’은 소한울음 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거기 매복한 백제 군사들이 어찌 신라 사람들이다 듣는 요상한 개구리 소리를 못 들었을 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들었다면 주술적인 그 시대 사람답게 매복 위치를 즉시 옮겼어야 마땅하므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실린 말이 싹틀 여지조차 없다 하겠다.

둘째, ‘오미-못’과 ‘옥문지’는 소리나 뜻이 전혀 다르다.

‘오:미-못’을 현지 사람들은 ‘올:미-못’, ‘올비-못’, ‘올:-못’ 또는 ‘오:미기-못’이라는 등등 여러 이름으로 섞어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말, 그것도 한자말인 ‘옥문지’(玉門池)와는 근본적으로 소리와 의미가 틀리기 때문에 두 낱말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실적으로 ‘소산’ 즉 ‘보지산’에 내린 빗물이 집수 되는 못은 ‘부처못’이나 ‘오미-못’과는 전혀 다른 그 서쪽에 있는 ‘소산못’이다. ‘보지산’의 바로 밑쪽에 위치한 이 작은 못을 굳이 한자로 표기하자면 ‘옥문지’라고 억지를 피울 수 있을지 모르나, 현지에서 ‘소산 못’ 이외의 다른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역사책에 실린 ‘옥문지’와 일치할 수는 도저히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근곡 중앙에 샘이 있긴 해도6) 거기 ‘옥문지’란 이름은 붙지 않았으며, ‘여공골’ 아래 연못 이름이 ‘옥문지’란 것은 물론, ‘오미-못’을 ‘옥문지’로 보는 견해도 사실과 어긋나며, ‘여공골’이란 땅이름도 현지에선 채집할 수 없었다. 따라서 글쓴이의 견해로는 역사가들이 우리말 ‘보지’를 차마 역사책에다 표기하기 곤란하여, 할 수 없이 한자를 빌어 점잖게 ‘옥문지(玉門池)’ 또는 ‘여근곡(女根谷)’으로 적은 듯 하다.

6) 현지에선 거기 들어 갈 수도 없으며, 샘에 따로 이름이 붙어 있지도 않다.

4. ‘오:미못’의 말밑

가) ‘올비’란 식물과의 개연성

앞에서 말한 ‘오:미-못’의 다양한 이름들이 ‘옥문지’와 구별되는 것이라면, ‘오:미-못’의 말밑은 과연 무엇일까?

‘오:미-못’이란 땅이름의 앞가지인 ‘오-’ 나 ‘올-’은 모두 ‘올-’에다 뿌리를 둔 말인데, 그 말밑을 ‘올미’나 ‘올비’에서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무엇보다 먼저 ‘오:미-못’에는 방언으로 ‘올비’7) 라고 부르는 풀이 지천으로 자생하고 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올비’는 보리를 갈면 얼어죽으리 만큼 습기가 많고 척박한 토질에 나는 잡초의 하나다. 봄날이면 아이들이 진흙바닥에서 구슬모양의 알뿌리인 ‘올비’를 군것질 삼아 캐어 먹는다.

7) ‘올비’란 줄기의 직경이 2-4mm쯤으로 실파처럼 속이 비어 있고, 높이는 30-70cm이며, 라디오 안테나처럼 중간중간에 마디가 있는 풀이다. 외줄기 밑둥에는 껍질이 검은자주빛이면서 달래 뿌리처럼 생긴 구슬 같은 게 달려있다. 그 알뿌리를 방언으로 ‘올비’라 하며, 속살은 희고 제법 단맛이 돈다. 씹으면 날 감자처럼 아삭아삭하는 소리가 나는데, 표준말로는 ‘올방개’라 하고, 학명은 Eneocharis Kuroguwai 이다.

논에 이 올비싹이 돋으면 토질이 척박한 증거로 삼지만, ‘오:미-못’에는 무성한 올비싹이 큰 떼판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마을에서 "올비 캐러 간다."고 하면 으례히 ‘오:미-못’으로 가는 줄로 알만큼 ‘오:미-못=올비’가 당연시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 풀은 결코 이곳에만 자생하는 희귀종이 아니고 경기, 강원 이남의 한반도와 일본에도 자생하는 잡초의 하나다.

한편, 경주말에는 미음 [m]과 비읍 [b] 소리를 쉽사리 바꾸어 쓰는 수가 적지 않은데 그 보기를 들면 다음 표와 같다.

표 [m] 과 [b]의 소리 바꿈

[b] 소리 발음 [m] 소리 발음

암소 열 바리 암소 열 마리

한 번만 보자 한 문만 보자

꽃 봉오리 꽃 몽오리

능글밪다 능글맞다

공일밪다 공일맞다

칠칠밪다 칠칠맞다

위 표에서 보듯이 [m]과 [b]는 서로 바뀔 수도 있기에 ‘올비’는 ‘올미’로 소리날 수도 있는 바, [olbi]↔[olmi]↔[o:lmi]↔[o:mi] 등으로 변하여 여러 가지 다른 소리의 땅이름이 나타났을 법하다. 또 [o:lmi-mos] 이란 말에서 겹치는 [m]소리가 단순화되어 [o:l-mos] 으로 변했다고 본다. 나아가, 경주말에서는, 능선 위의 안부(鞍部) 즉 고개를 뜻하는 ‘목’을 ‘매기’ 또는 ‘미기’라고 하기 때문에 (보기: 서낭목→서낭매기→서낭미기) ‘올:못’의 길목에 위치한 언덕은 ‘오를-목’, ‘올-목’ 또는 ‘오미기-산’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o:mi-mos]의 말밑은 ‘올비’라는 식물이름에서 비롯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오미(五美, 五味)와의 개연성

‘오미’란 땅이름은 전국에 걸쳐 산재하고 있는데,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의 오미리(五味里), 경북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五味里), 충북 청원군 옥산면 오산리의 오미(五美, 五味),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五美里) 등등이 그것이다. 五美의 뜻이나 말밑으로는 ① 들 가운데 작고 둥근 동산이나 ② 다섯 가지 아름다움을, 五味는 다섯 가지 맛을, 또 순우리말로 ‘오미’는 ① 다섯 봉우리가 둘러친 안쪽, ② 평지보다 낮으면서 물이 괴는 곳, 또 ③ 옛말 ‘’에서 ‘옴뫼→옴메→오메→오미’로 변했다는 설과 더불어, ④ ‘꽁무니’의 옛말인 ‘오미뇌→오미’설 등으로 다양한데, 이곳은 ‘평지보다 낮으면서 물이 괴는 곳’이란 주장에 걸맞을 만한 지형이다.

다) ‘오르막’과의 개연성

다른 견해로서 이 부근 지형과의 개연성을 들 수 있다. 현지에서 ‘오:미기-산’이라 부르는 동서로 뻗은 못 옆의 작은 등성이는, 서쪽이 다소 높고 동쪽이 낮은 가느다란 지형이어서, 이곳을 옛날엔 ‘올리-받이’인 ‘오르막’ 또는 지역말로 ‘오리막’이라 불렀음직하다. 여기서 [orumak]↔[olmak]↔ ↔[olmok]↔[olmiki]↔[omiki]↔[o:mi] 등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땅이름으로는 충북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兀山里) = ‘올미 ’가 있는데, 이 경우에는 ‘오른(름)뫼’→‘오르메’→‘올미’로 변하고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o:mi-mos]의 말밑은, 지형인 ‘오르막’에 바탕을 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하겠다.

5. ‘오:미기산’과 등짐장수

‘보지산’에서 동쪽의 들판을 가로질러 곧바로(7 마장쯤) 건너다보면, 구미산(594미터)의 산자락에 해발 2백 미터 안팎의 야산들이 즐비한데, 그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인 ‘보룸불’(바람불이-봉. 266미터)이 있고, 거기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 길다란 ‘불탄-양달’이란 등성이가 ‘오갱이’ 골짜기 속에 부끄러운듯 숨어서 들녘 서쪽의 ‘보지산’을 향해 마주앉아 있다. 이 ‘오갱이’는 ‘큰오갱이’와 ‘작은오갱이’로 나누어져 있는데, ‘작은오갱이’ 입구의 남쪽에는 ‘불멧등’, ‘불매땅’ 또는 ‘불뫼산’이라는 땅이름이 있다. 양근(陽根)에 해당하는 ‘불탄양달’의 형상은 곧은 등성이이긴 하나 송이버섯의 머리 부분이 뚜렷치 못한 까닭에 남근(男根)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남근으로 볼 참이면 포경 상태라 해야 마땅할만하다. ‘불멧등’의 모양도 ‘보지산’의 기묘한 형상에 견주리 만큼 ‘불알’ 모양이 뚜렷하지는 못하지만 그 형상은 지도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고환이 들어 있는 음낭을 닮았는데, 현지에서 ‘보지산’과 ‘불탄양달’ 및 ‘불멧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를 채집할 수 있었다.

집도 절도 없이 나돌아다니다가 논두렁 밑에서 옹솥에다 밥을 익혀놓곤, "온 솥의 밥 지어 놓고, 나 혼자 다 먹어야만 하는 내 팔자야......"라고 홀아비의 신세 타령을 늘어놓던 한 등짐장수가, 어느 날 ‘보지산’ 밑의 ‘섶들’(현지 발음: [siptul, septul]) 마을 앞을 지나치려니까 동쪽의 ‘불탄양달’ 등성이가 잔뜩 길게 늘어져서는 들녘 너머 ‘보지산’에게 장가를 들려고 한창 서두르는 참이었다.

나이 마흔에 가깝도록 장가 한 번 들지 못한 등짐장수가 이를 보자 금새 심술이 치밀어,

"어허! 참, 장히 보기 거북하도다." 하며 작대기로 그 늘어진 중동이를 힘껏 내려쳤다. 그러자 중동이가 끊어진 ‘불탄양달’은 ‘오갱이못’ 안쪽으로 한달음에 바짝 오그라들었으나, 끊어져버린 귀두(龜頭)는 그 자리에서 짜부라든 채 오도 가도 못하고 ‘부처못’과 ‘오:미못’ 사이에 주저앉아, 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길다란 언덕의 형태로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 끊어진 귀두가 ‘오:미못’ 부근에 지금도 있는데, 이 산을 오늘날 ‘오:미기-산’이라 한다. 만약 등짐장수의 그런 심청이 없었던들 ‘불탄양달’의 형상은 ‘보지산’에다 견줄만할 수 있었을까?

우리말의 ‘불’은 (1)불[火]의 뜻과 (2) 부리(夫里), 부루(夫婁) 및 과 (3) ‘벌’ 곧 ‘벌판’과 함께 (4) 종자나 씨 즉 고환을 싸고 있는 ‘불알’의 뜻을 지녔다. 그런데 ‘불뫼산’의 높이는 얕으막하나 서쪽의 경사가 가파르며, 토질은 청석이어서 야생대추나무인 ‘매추나무=멧대추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잡초 우거진 속엔 ‘까치독새(살무사)’도 흔하게 살고 있었다.

서정범 선생(경희대 알타이어 연구소장)의 학설에 따르면, ‘불’이란 [부여] < [브루] (沸流) < [불] 의 흐름으로 이어졌는데, 알타이어인 골디어에서 [부리]는 남편을 뜻하고, 올차어에서 [부리]는 가족을, 만주어에서는 자손의 뜻을 지니며 그 조어(祖語)는 [블]이고, 투르크어에선 종자, 손(孫)을 뜻하고 조어는 [블]이며, 일본어에서는 [huguri]=[睾還]이고 그 조어는 [불]이라 하고있다.

여기서 [불] < [붇] < [븓] (腎. 根. 種子. 人)이 갖는 의미가 확실해졌으며, ‘불멧등’이란 ‘불알’을 뜻하는 ‘불알-뫼-등성이’란 것이 더욱 명백해졌다.

또한 [븓] > [볻]이 모음 변이를 통하여서 [볻] = [pot]은 [볻이]=[boci]로 변했기에 바로 여자의 성기에 대한 순 우리말이 되었으며, 일본 고어에서 여근(女根)을 [hoto]라 하는데서 [hoto]=[poto]=[pot]로 이어져 우리말이나 일본말에서 여자의 국부 이름은 다 같은 조어(祖語) 즉 [pot]임을 알 수 있다.

나아가 남성의 국부를 뜻하는 [put]이나 여성의 그것을 가리키는 [pot]의조어는 하나의 뿌리인 [븓]이라 할 수 있으므로, [put]이나 [pot]은 다 같이 [븓]에서 파생된 말이라 하겠다.

6. 마 무 리

이상으로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린 ‘여근곡’이란 땅이름과 관계 되는 산의 위치와 지형 및 설화 등을 살펴봤는 바, 사기나 유사에 실린 ‘옥문지’란 못은, 지금의 경주시 외곽인 서천 철교 부근의 영묘사터에 있었고, ‘오:미못’은 경주에서 서쪽으로 20 키로미터나 떨어진 ‘섶들’ 마을의 ‘부처못’ 동편에 있어 서로 전혀 다른 지점임을 밝혔다.

또 ‘옥문’이란, 다름아닌 여성의 성기인 보지 곧 [pot]의 파생명사인데 이를 차마 소리나는 대로 적기가 무엇하여, 점잖게 한자로 고쳐 쓴 것에 불과하여, 음문(陰門), 하문(下門), 여근(女根), 옥문(玉門), 음호(陰戶), 여자의 음부(陰部) 등등 과 같은 여러 표기법 가운데서 적절히 골라 옥문(玉門)이나 여근(玉門)으로 적었을 뿐 인 것이다. 그건, 지금 논의의 대상이 된 산을 두고 아무도 현지에서 역사책에 올라 있는 것처럼 한자말로 ‘옥문곡’이나 ‘여근곡’이라 부르지 않고 순 우리말인 ‘보지산’이라고 흔히들 일컬어 오고 있음에서 확인되었다.

나아가 ‘오:미-못’과 ‘옥문지’는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대신, ‘오:미-못’의 말밑은, 평지보다 낮기에 물이 괴는 곳이라서 ‘올비’가 자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형적으로도 ‘오르막’이기 때문에, 이런 복합적인 바탕에서 비롯된 말임을 살펴보았다.

아울러 여성의 상징인 보지산은 들판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반하여, 들판 동녘의 지형을 고찰한즉, 비록 전설상의 ‘불탄양달’이야 귀두가 끊어졌을지언정 실재 모양[形象]은 포경상태의 ‘자지[cot]’형상이며, 그 밑쪽에 위치해 있는 ‘불뫼등’은 남성의 씨앗주머니인 ‘불알’모양이기에 ‘불알-뫼-등성이’에서 ‘불뫼둥’으로 바뀌었는데, 이들 ‘불탄양달’과 ‘불뫼등’이 이루는 야산군은 다름 아닌 남성생식기의 총체인 ‘부자지’로서 들판 서녘에 자리한 ‘보지산’을 건너다보는 위치에 있어 땅이름 자체끼리 서로 대응 관계에 있음을 밝혔다.

서쪽은 여성의 상징이고 그 땅이름은 보지[boci]에서, 동쪽은 남성의 상징이고 그땅이름은 부자지[bucaci]에서 비롯되어 서로 대응되고 있지만, 이들 말의 조어는 각각 [볻]과 [붇]이란 한 뿌리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 글은 한국땅이름학회에서 발표된 원고임)

1990. 4 “땅이름”

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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