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히꼬-배꼽 달린 냉장고

사투리* 김 주 석

자정이 넘은 시각, 찌는 듯한 ‘멕시코시티’에서 갈증을 못 이겨 마실 걸 꺼낼 참으로 냉장고문을 열려니까 웬일인지 꼼짝을 않는 거였다. 이럴 수가? 앞으로 당겨도 옆으로 밀쳐도 옴쭉달싹을 하지 않았다.

어떤 뚜껑 달린 물건은 배꼽단추를 누르면 ‘열려라 참깨’ 구실을 한다던데 싶어 배꼽 같은 게 있나 더듬어봐도 찾지를 못했고, 열쇠 구멍조차 없는 것으로 미뤄, 속으로 얼어붙은 게 아니면 고장난 게 틀림없었다.

‘세상에! 냉장고가 망가졌으면 당장 고쳐놓을 일이지 그래, 별이 다섯 개씩이나 붙은 호텔이람서?? 이것 하나로만 미뤄봐도 멕시코는 후진국에 틀림없나 보다!’

싶어졌다. 그런 심한 욕을 씹는데도 목이 자꾸만 타오는 통에 별의별 안간힘을 써봤지만 결론은 ‘못 열겠다, 꾀꼬리!’였다.



그해 겨울 우리는 2차 석유파동으로 엄청난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영아원의 핏덩이가 동상에 걸려 얼어죽을 판인가 하면, 방귀 깨나 뀌는 분들 사모님 짜리는 기름을 안 주면 우리 사장님 목을 날리겠노라고 엄포를 놓는 등 천방지축의 세월이었다.

그렇게 시달리다 못해 나는, 정유회사에서 원유조달책을 맡고 있었던 까닭에, 무람없이 원유를 구해 보겠답시고 멕시코로 날아갔을 때의 일이다. 나름대로는 우리의 딱한 사정을 멕시코 원유 당무자에게 구구히 늘어놓았지만 그의 표정이 시답잖게 듣는 눈치길래, 훗날의 자원외교를 겨냥해서 스냅 사진이나 찍어 두려 들었는데, 뜻밖에도 그 사람이 황급히 렌즈를 가리며,

“사진에 찍히면 영혼이 빨려들어 가기 때문에 싫다.”는 궤변을 토하는 것이 아닌가. ‘이게 어디서 익히 듣던 소린데?’ 싶어 되짚어 보니 개화기의 대원군 시절에 하던 소릴 지금에사 복창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첨단의 국제 원유 거래에 종사하는 작자가 19세기적 소릴 되씹고 있다니? 나는 그로써, 멕시코가 백 년쯤 뒤진 ‘후진국’이라고 깔보기 시작했다. 게다가 거리에 넘쳐나는 혼혈아들 또한 그들의 미개함을 증명하기에 충분스럽게 보였다. 더구나 제 나라 이름조차 ‘멕시코’ 대신 흔히들 ‘메히꼬’라고 발음하는 것에도 무식이 마구 묻어나는 듯 싶었다. 아무렴, 이들이 제대로 된 문자마저 없던 인디안의 후손이고 보면 문맹인 게 당연할 테지. 암! 그렇고 말고......

그쪽에다 비교컨대, 우리 한국은 참으로 훌륭한 한글에다 튀기가 드문 단일 민족임을 생각할 때 어찌나 뽐내고 싶은지 속으로 끓어오르는 거드름을 주체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조금은 우쭐해진 채, 그때까지 뒷전에 미뤘던 호텔 첵크인을 저물녘에야 했는데, 검둥이 벨 보이가 TV와 욕실 쓰는 법은 이러저러하다며 서툰 영어로 나를 가르치려 드는 품이 꼴같잖았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석유상들과 건당 수 천만 달러 짜리 거래를 척척 결정할 뿐더러, 세계 주요 도시에서 손꼽는 호텔들만 누벼온 나를 몰라보고 냉장고붙이 쓰는 법을 가르칠 셈으로 나오다니? 참으로 가소로워 보였다. 그래서 핀잔을 잔뜩 섞어,

“됐네, 이 사람아! 내가 다름 아닌 OIL EXECUTIVE(석유 회사 중역)이라네.” “Don't to teach a fish how to swim.”(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을 생각일랑 말게!)라고 된통 쏘아줬는데도, 녀석은 어설피 어깨만 들썩하는 걸로 봐서 내가 말하는 문자속을 모르는 눈치였다. 아무렴, ‘무식한 귀신은 진언(眞言)도 모른다’ 했으니 어찌 고급 속담의 참뜻을 네까짓 게 짐작인들 하랴. 모르는 것이 당연할 테지......

그 ‘메히꼬’의 밤 시간은 한국의 대낮인 탓도 있지만, 그보다 원유를 구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더욱 불면을 불러왔다. 잠도 안 오고 어쩔까 싶어 하늘을 보니 ‘원유구득 희망’ 만큼이나 별빛도 흐려 있었다. ‘첫 술에 배부르랴? 나중에 또 부딪쳐 봐야지.’라며 조금 구겨진 기분으로 호텔 뒷골목을 거닐자니 나도 모르는 겨를에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통에 ‘데퀼라’를 홀짝거린 것이 어느새 거나해지고 말았다.

비낀 달빛을 밟고 호텔로 돌아와 보니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인데도 무척이나 후덥지근했다. 샤워를 할 참으로 옷을 벗어 던지니 목이 칼칼해 오기에 냉장고 문을 열려는 찰나, 그게 그만 꼼짝 않는 황당함에 빠지고 만 것이다.

아무리 목이 타도 그렇지, 세균이 득실거릴 ‘후진국의 수돗물’을 마시므로 써 객귀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터에다 술기운 덕분에 제법 우쭐해진 김이라 옷을 벗은 것도 잊은 채 룸서비스를 호기롭게 불렀다.

선하품을 씹는 보이 녀석에게 “왜 냉장고가 이 모양이냐?”며 기고만장하게 호통부터 치자, 눈을 흡뜬 그가 내 발칫께를 흘깃하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이 좀 별스러웠지만,

“손님, 방문 열쇠부텀 좀 주이소.” 하길래

“이런 되통스러운 녀석. 냉장고에 어찌 방문열쇠가 당하느냐?”며 야멸치게 면박을 줬는데도, 그는 오히려 나한테 코방귀를 뀌며 냉장고 쪽으로 쓱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꼼짝을 않던 문제의 냉장고가 소리 없이 스르르 열리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도깨비 노름이람? 내가 취했남? 녀석이 ‘열려라 참깨’란 주문을 외운 것도 아닌데 저처럼 쉽사리 열리다니?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겸연쩍어진 내가 ‘어인 영문이냐?’는 투로 눈을 끔벅이자, 그는 역습의 기회를 잡은 듯 의기양양해져서는,

“방 열쇠에다 마그네틱 처리를 해서 냉장고 열쇠로도 겸용한다”는 거였다. 이어서,

“암 꺼도 모르는 주제에 내칠 땐 언제고 자는 사람 깨우는 건 또 무슨 심사냐?”며 세차게 따지고 드는 데야 당할 장사가 있남? 속수무책으로 벌게졌지!

‘모닥불을 끼얹은들 이보다 더 뜨거울까?’ 난감해진 채

“음, 저, 저.....”하고 더듬수를 놓는데, 마지막 일격이 또 치닫기를,

“그 바지라도 좀 걸치시지 그래.”라며 아예 시비조로 나오는 데야 뭘로 반격해? 순간에 술이 확 깨버렸다. 아랫도리가 문젠가 시방? 비록 홑중의를 걸친다 해도 그건 ‘어레미로 샅 가리기’일 뿐인 것을...... 그보다 녀석에게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수치로 인해 전신에 닭살이 확 돋는 것이었다. 애시당초부터 단편적인 선입관에 젖어 시건방지게 그를 업신여긴 교만이 화근이었다.

이튿날 우리 주재관에게 차분히 들어본 바, 한국은 그 즈음 8년 뒤에나 치를 올림픽 준비로 요란법석을 떨기 바쁜 판이었는데, 그들은 우리보다 20년 앞서(1968) 올림픽을 잔치답게 치렀을 뿐더러, 그 여파의 경제부흥으로 ‘냉장고의 배꼽’까지 개발하는 수준에 오른 거란다. 그 뿐인가 우리는 음료수라면 기껏해야 사이다가 고작일 때 거긴 ‘포카리 뭐’ 같은 이온음료수가 냉장고에 즐비한 판이었다. 그런 추세도 모르면서 함부로 깨춤을 추던 내가 큰코를 다친 게지, 뭘!!!

더구나 우리의 ‘서울’이 나라 밖에선 ?셰울?이고 ‘나일’강은 이집트 현지에서 ?닐?이라 하듯이, ?멕시코?는 현지 발음대로 ?메히꼬?라 해야 맞는 소리라는 데야 어째?


교만을 떨다가 이토록 심한 코침을 맞은 뒤론, 뭐든 모르면 세 살배기한테라도 묻는 게 상책이라는 걸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요란스런 빈 수레가 되어 무안을 당하느니 아는 길도 물어 가라시던 옛 선비님의 말씀을 본받음만 같지 못한 것을.......

./.

* '사투리'는 김주석의 별명임.

경주춘추 1994년 봄호(1994.03.25발행)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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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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