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수 풀이
글: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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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 주막에서 삼베로 된 상장(喪章)을 단 중년의 사내가 개장국을 퍼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상주가 개장국을 먹다니?’
이걸 못마땅하게 여긴 어떤 노인이 한마디 던졌다.
“여보, 보아하니 상중인 모양인데, 상제인 주제에 버젓이 개장국을 사 먹는단 말이오?”
하고 핀잔을 주니, 사내의 대답이 걸작이다.
“아니 노인장, 그런 말씀 마십시오, 실은 우리 누님의 아들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서 이 상장을 달았을 뿐인데, 시장한 김에 개장국 좀 먹은들 뭐 잘못된 것 있소?” 하고 나왔다.
‘음, 그럼 내가 이거 실없는 소릴 했남?’
머쓱해진 노인은 그래도 뭔가 미심쩍은 얼굴로 입맛을 다시며,
“거, 아무래도......? 도무지 이거 도깨비 촌수 같아서 원......”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사이 중년의 사내는 얼른 그릇을 비운 뒤 자리를 떠버렸다.
아이들이나 젊은 사람이 딸꾹질을 심히 할 때, 한 비방(秘方)으로, 갑자기 외할머니의 성씨를 물으면 놀란 김에 딸꾹질이 뚝 멈추는 수가 있다. 이는 ‘한 집에 있어도 시어미 성을 모른다’는 속담처럼, 외할머니의 성씨를 곧바로 대답하는 사람이 드문 법이기에 생긴 습속이다. 내 말이 미심쩍으면 독자 자신이 스스로에게 외할머니 성씨를 한번 물어보기 바란다.
형수 되는 사람이 시동생을 흔히, ‘삼촌’이라 부르는 것을 본다. 자기 아이 이름을 앞에 붙여 ‘아무개 삼촌’이라면 또 몰라도 말이다. 어쨌거나 그건 지칭(指稱)은 될지언정 호칭(呼稱)은 아닌데 모르는 사이에 ‘아무개 삼촌’이 그냥 ‘삼촌’으로 공공연하게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날 자기 남편을 ‘도련님 형’이라고 우회하여 지칭한 경우는 있으나, 어쩌다가 지금은 지칭과 호칭이 범벅이 되었을까?
이런 현상은 핵가족화 되어 가는 도시 생활이 가져온 일종의 병폐랄 수 있다. 핵가족 제도하에 자란 사람들이, 이종 사촌을 ‘이모 아들’이나 ‘이모 딸’이라 지칭하거나 소개하는 것을 볼라치면 좀 아연하다. 이들에게 ‘내외종간’이라고 하면, 앞서의 노인처럼 아리송해 지는 모양이다.
누님의 아들은 생질 조카이고, 자기 집 아이들과 생질 조카 사이는 내외종간이며, 그 생질 조카의 외조부는 바로 중년 사내의 아버지다.
숙부님도 아저씨, 고모부도 아저씨, 당숙부님도 외숙부님도, 심지어 형부나 이모부님도 모두 아저씨로 호칭한다. 낯모르는 남자까지 전부 부르기 쉬운 게 아저씨일뿐더러, 아주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됐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위에는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너무 흔하다. 적어도 지칭과 호칭은 구별되어야 마땅한데, 도무지 그렇지를 못하는 것이 애달프다.
어느 날 한 동료가,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첫 아기 돌날에 자기 어머니와 함께 외숙부가 오시도록 되어 있는데, 아기와 자기 외숙부의 호칭은 어떠하냐고 사뭇 걱정하는 것을 듣고 부터 수수깨끼 놀이하듯 촌수풀이를 해본다.
아버님이나 숙부님의 재종형제 되는 분은 재당숙부님이고, 할아버님의 누이 되는 분은 왕고모님이나 대고모님, 아버지의 외갓댁은 진외갓댁이라 부른다고, 남자(♂)와 여자(♀)를 그려 놓고 이쪽과 저쪽을 짚어가며, 풀이를 해본다. 이렇게 손아랫사람의 손윗사람에 대한 지칭과 호칭을, 또 그 반대까지 풀이하다 보면, 나도 그만 막막한 인척 관계가 나와 곤혹스러울 때가 없지 않다.
어쨌든 정신 체조 삼아 모두 공부를 해볼 일이다. 옛것은 무조건 버려야 할 유산이라는 생각은 고쳐먹을 일이다. 부르고 대답하는 핏줄 관계. 이것은 한국인의 위대한 유산이니까.
./.
월간 '한국인'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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