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운 호칭, 택호

글: 사투리

요기엔 산새소리가 가득......


장터 초입의 당수나무 아래에서 담배 가게를 열고 있는 서글서글한 여인은, 남편을 일직 사별했는지, 젊을 때부터 혼자서 가게를 지키며 아이들을 키워왔다.

사람들은 그 이름 없는 담배 가게를, 그 여인의 어릴 때 이름을 따서 ‘허필련네 가게’라고 불렀다.

부엌 용품과 비누 등속의 일용 잡화를 팔며 착실하게 돈을 모아서 무슨 상회란 간판까지 걸었건만, 동네 사람들은 간판 이름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입에 익어 쉬울세라 계속 ‘허필련네 가게’라고만 부르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한 소년이 가게에 오더니만,

“허필련이 엄마요, 담배 주이소.” 하더란다.

이미 귀밑에 서리가 허연 그 가게집 여인은 소년의 말을 듣고 겉으로는 소탈하게 웃어 넘겼을 뿐 아무 말을 하지야 않았으니, 소년은 그 여인이 왜 웃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이 여인의 경우는, 나이가 들어서도 아잇적 이름이 계속 불려진 특이한 예에 속한다. 한국 여인은 대부분 처녀 때는 성도 있고 이름도 있었는데 반해, 결혼을 한 뒤에는 대체로 이름이 없어져버린다. 이름은 물론 성씨조차도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도 함부로 부를 수가 없으니까. 그러다가 늙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다시 본관과 성만 지방(紙榜) 위에 되살아난다.

부르고 대답하려고 짓는 것이 이름일진데, 한국의 가족 제도는 남의 집 부인된 이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게끔 만들어 왔다. 시부모가 며느리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시동생이 형수씨의 이름을 부를 수는 더더구나 없을 뿐더러, 부르지도 못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내렸다. 따라서 할 수 없이 생긴 것이, 누구네 집 며느리나, 아무개 어미라고 둘러서 부르는 길뿐이다.


전에는 장가를 들면, 잔치 이튿날 동상례(東床禮)라는 잔치 뒤끝을 벌였었다. 이는 서로 얼굴을 익히기 위한 풍습으로 신랑을 다루는 일종의 장난이었다. 때로는 신랑에게 운자를 주어 글도 짓게 하고, 첫날밤의 일들을 재연해 보라고 위압적으로 어르기도 했다. 간혹 주변이 없는 새신랑은 명태로 발바닥을 얻어맞기도 하고......

장난이 지나쳐 행여 신랑이 곤경에 빠지거나 다칠 성싶은 무렵이면, 상객이 술과 안주를 내리기도 하고 이때 처가 동네 어르신들이 나타나 신랑과 몇 마디 재치 문답을 나눈다. 재치문답을 큰 무리 없이 통과하게 되면 노인들은 신랑에게 택호(宅號)를 지어 주었다. 택호란 좋은 글자를 넣거나 처가 동네의 이름을 따서 부르기 쉽고 외우기 좋게 짓곤 하였다. 이를테면,

“자네 택호는 큰대자, 편안안자, 대안(大安)으로 하게나. 좋은 택호일세. 앞으로 부귀 영화를 누리며 다복하게 살기를 축수하네.”하는 것이었다.

아 이 얼마나 멋진 풍류인가?

이렇게 택호를 얻은 새신랑은 당장 그 택호를 써먹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불러 줘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절차를 밟아야 했으니, 이듬해 정월 대보름날을 기하여, 지난 해 결혼한 동접들과 함께 자기 동네 어르신들께 일일이 술잔을 돌리며, 합동 택호 신고식을 가졌다. 앞으로는 아명 대신에 아무개(택호)라 불러 주십사 하고.

이런 신고 절차가 끝나면 비로소 새신랑은 ‘대안’이 되고, 새각시는 ‘대안댁’으로 통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소꿉동무라도 애 아범이 되면 서로 이름을 부르기가 민망스러운 법이다. 더구나 장가를 든 뒤에 본 이름 대신에 부르던 자(字)란 것도 지금은 없어졌으니......

택호는 본동과 처가 동네는 물론, 인근 동네에서도 누구나 아무 스스럼없이 부를 수 있는, 한 가족 집단을 통틀어 지칭하는 것으로 말이다.

이를테면, 손위 어른들은 “여보게 대안이 오늘은 장에 안 가는가?” 하고 말을 걸고, 아이들은 “대안 아저씨나 대안 어른”이라 부르면 된다. 그 부인에게 “대안댁, 이리 오게”라거나 “대안 아주머니, 빨래하러 갑시다.”고 하면 된다.

기쁜 소식이나 슬픈 소식을 전해야 할 경우에는, 어느 동네 아무 댁이라고 써 보내면 번지가 없어도 영락없이 찾아간다.

이처럼 우리 선인들은 갓 결혼한 새신랑과 더불어. 결혼하고 나서 이름이 없어진 새색시에게 이렇듯 훌륭한 이름, 즉 택호를 지어서 부르게 한 것이다.

한국인의 정겹고 구수한 멋의 한 자락이 숨어 있는 풍속이 아닐 수 없다. 선조들의 지혜를 보존, 활용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한국인의 멋인 것을.......



월간 '한국인'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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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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