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거짓말 "의심의 여지없다"는 정치인의 말, 의심하라
정치인의 거짓말 필요악인가? 아닌가?
'공화국의 위기' - 국가 생존 걱정보다
국가 이미지 때문에 거짓말을 한 정치인
'왜 리더는 거짓말…' - 국제정치 행위의 일부
민주주의 지도자가 거짓말할 가능성 커
"의심의 여지가 없다."(2002년 8월 딕 체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2002년 9월 파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2003년 2월 파월) "의심의 여지가 없다."(2003년 3월 부시)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최고 수뇌부는 2002년 중반부터 2003년까지 거듭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의심의 대상은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와 생물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증거? 없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거듭거듭 강조했고, 결국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했다. 그리고 확인된 것은 어떤 대량살상무기, 생물학무기도 없었다는 점이다. 왜 정치인들은 거짓말을 할까? 거짓말은 필요악인가, 나쁘기만 한가?
신간 '공화국의 위기'와 '왜 리더는 거짓말을 하는가?'는 바로 이 문제를 파고든다.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정치에서의 거짓말' '시민불복종' '폭력론' 등 3편의 논문으로 구성된 책 '공화국의 위기'에서 1971년 뉴욕타임스 특종기사로 세상에 알려진 이른바 '펜타곤 문서'와 관련해 베트남전쟁에 관한 미국 정치인·관료들의 거짓말을 분석한다. 국제정치학계의 석학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2003년 이라크전쟁에서 모티브를 얻어 국제정치와 거짓말의 상관관계를 분석한다.
◇'국가 이미지'를 위한 거짓말
미국이 베트남전 확전을 위한 구실로 삼았던 '통킹만 사건'이 조작됐다는 내용 등을 담은 '펜타곤 문서'를 통해 아렌트는 당시 국방부 관리들이 "국가의 생존, 존망이 걸린 이유 때문이라기보다 국가의 '이미지'를 위해 거짓말을 했다"(42쪽)고 말한다. 이는 '잘못된 애국심'이라 표현됐다. 즉, "패배가 국가의 안녕에 대해서가 아니라 '미합중국과 대통령의 평판에 대해' 가져다줄 충격에 대한 두려움"(48쪽)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 같은 의사결정 과정에 '참된 위험'보다는 '나쁜 결과가 가져다줄 충격'을 최소화하는 기술인 '홍보'개념이 개입되면서 더욱 정치인의 거짓말을 부른다고 말한다. 그것은 "거짓말이 종종 현실보다 더 그럴듯하며 이성에 더 호소력을 갖기" 때문이다. 특히 이 같은 거짓말은 주로 국내 선전용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적은 모든 사실을 알지만 의회는 전혀 모르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말한다.
◇국제정치에서 거짓말은 무죄? 유죄?
"전시에 진실이란 너무나 귀중한 것이어서 늘 거짓말이라는 보디가드의 수행을 받아야만 한다"고 한 것은 영국 총리 처칠이었다. 아렌트의 분석이 다소 당위론적으로 흐른다면, 미어샤이머는 보다 현실적이다. 그는 정치인들의 거짓말은 국제정치 행위의 일부라고 여긴다. 국가들 사이의 국제정치 무대는 각 국가보다 더 높은 권위체가 없는 일종의 무정부상태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공포조장' '전략적 은폐' '민족주의 신화' 등 정치인의 거짓말을 분류한 그는 정치인의 거짓말은 국가 간에 벌어지기보다는 국내용으로 많이 사용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다소 거북한 케이스들도 보여준다. 가령 그가 '고상한 거짓말(noble lie)'이라고 평가한 '쿠바 미사일 사태'때 케네디의 행동이 그렇다. 그 당시 케네디는 쿠바 미사일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터키에 배치했던 미군의 주피터 미사일 철수를 소련에 제안했지만 국내에는 이를 감췄고 심지어 부인했다. 그리고 소련 측에는 양국 간 거래를 공개하지 말라며 "그렇지 않으면 미국은 양국 간 거래 사실을 부인할 수밖에 없고, 결국 합의도 파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내용은 30년 후에 밝혀졌다. 만약 소련의 조건을 들어준 사실이 드러났다면 미국 우파의 여론이 들끓었을 테고, 쿠바 미사일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케네디가 거짓말을 한 것도 사실이다. 이 경우의 거짓말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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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조장은 어느 나라가?
하지만 미어샤이머 역시 거짓말이 전략적 효용성을 넘어 훨씬 큰 대가를 치러야 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공포조장'과 '전략적 은폐'를 지도자들의 거짓말 중 가장 위험한 유형으로 꼽는다. 또한 전체주의 국가보다는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거짓말 가능성이 더 크다고 지적한다. 민주국가는 여론의 도움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이 글로벌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외교정책을 펴는 한 공포조장의 필요성을 느낄 상황이 숱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부시 행정부가 그토록 사담 후세인과 대량살상무기·생물학무기·빈라덴을 연결시키려 기를 쓴 것도 이 때문이다. "기억하라! 자국민에게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가장 큰 지도자는 바로 민주국가의 지도자면서 먼 외지(外地)에서 선택의 여지가 있는 전쟁을 하려 드는 경향이 있는 지도자라는 사실을." "미국이 품은 전 지구 차원의 야심을 감안할 때, 우리는 공포 조장이 앞으로 수년간 미국의 국가 안보 담론의 계속되는 특징이 될 것이라고 봐야 한다."(177쪽)
공화국의 위기
한나 아렌트 지음|김선욱 옮김|한길사|324쪽|2만2000원
왜 리더는 거짓말을 하는가?
존 미어샤이머 지음|전병근 옮김|비아북|222쪽1만5000원
김한수 기자
조선일보 201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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