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지팡이 4만 9600개 어른신께 나눈 ‘지팡이 목사님’
지난주 순천 대대교회 이야기 ‘교회의 저력, 지팡이 부대’를 정리하다 문득 ‘지팡이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지난 2008년 인터뷰한 충남 논산 광석면의 중앙감리교회 최병남(79) 목사님입니다. ‘최고급 지팡이를 만들어 무료로 전국에 나눠주는 목사님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교회를 찾았을 당시 최 목사님은 12년째 지팡이 2만 5000개를 배포한 상태였습니다. 교회 곳곳엔 지팡이 제작용 흰 막대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요.
최병남 목사님 생각이 나서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봤습니다. 아뿔사, ‘011′ 번호였습니다. 하긴 그 사이 14년이 흘렀네요. 교회에 전화를 드렸더니 담임목사직에선 은퇴하셨고 원로목사로 계신다며 연락처를 알려주셨습니다. 14년만에 반갑게 통화했습니다. 목사님은 저를 또렷이 기억하고 계셨고, 목소리는 14년 전이나 다름없이 힘찼습니다. ‘~했어유’라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도 그대로이셨습니다.
통화에서 최 목사님은 “지팡이는 4만 9600개로 끝났시유”라고 말씀했습니다. 최 목사님은 2013년 은퇴한 후에도 한동안은 지팡이를 만들었지만 “나이도 많아지고 해서 5만개를 400개 남겨두고 끝냈시유”라고 했습니다.
14년 전 인터뷰 당시에도 그랬지만 광석중앙감리교회는 전형적인 농촌교회였습니다. 주일 예배 참석인원이 100명 정도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규모의 교회에서 전국에 5만개 가까이 지팡이를 만들어 무료 보급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작은 1995년, 우연이었답니다. 가을 들판에서 명아주를 발견한 것이죠. 1년생 풀인 명아주는 긴 것은 2미터 가까이 자라지만 겨울이면 살짝만 건드려도 바스라지는 풀입니다. 옛 어른들로부터 명아주를 가공하면 훌륭한 지팡이가 된다는 말을 들은 최 목사님은 5년 정도 시행착오를 거쳐 명아주 가공법을 익혀 지팡이를 만들기 시작했지요. 요즘 어르신들은 망가진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엔 어르신들이 망가진 우산이나 나뭇가지를 짚고 다니시는 걸 보고 명아주 지팡이를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당시에 목사님이 쉽게 말씀하셔서 저는 속으로 ‘과정이 그리 어렵지 않은가 보다’ 생각했는데, 이번에 다시 여쭤보니 일종의 화학공정이었습니다. 늦가을이 되면 전국의 명아주 군락지를 찾아 지팡이로 쓸만한 곧고 튼실한 놈들을 구해오는 것이 시작입니다. 처음에는 논산 부근 충남 일대에서 시작했지만 좋은 명아주를 찾아 전국을 누비게 되셨다고 하지요. 그렇게 모아도 1년에 1000개 모으기가 빠듯했답니다. 모아온 명아주는 뿌리의 흙을 잘 털고, 잘 다듬고 불로 그을리고 삶아서 바짝 말립니다. 이후에 곱게 사포질하고 옻칠을 입히는 과정이 많게는 아홉번 반복된다네요. 마지막으론 땅바닥에 닿는 지팡이 끝에 고무를 붙입니다. 전체 20가지쯤 되는 공정을 모두 거치면 반짝반짝 붉은 색이 감돌며, 단단하지만 가벼운 지팡이가 됩니다. ‘청려장(靑藜杖)’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면 개당 8000원 정도의 원가가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인터넷에선 5만~10만원선에서 판매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최 목사님은 4만 9600개를 모두 무료로 나눴습니다. 처음엔 본인 사비로, 이후엔 논산시 예산도 보탰지요. 2012년엔 논산시민대상도 수상했습니다. 최 목사님은 청려장을 만드는 전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해 뒀습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청려장을 만들고 싶으면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만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지요.
2008년 제가 방문했을 당시엔 수확한 명아주를 말리는 중이어서 하얀 명아주 줄기만 봤는데요. 이번에 최 목사님이 보내주신 사진을 보니, 한창 작업할 때에는 교회 주변을 지팡이가 빽빽하게 채운 풍경이 장관이었네요.
사실 2008년 최 목사님을 인터뷰했을 때에는 ‘지팡이 목사님’이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인터뷰하면서 많은 점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1972년 광석중앙감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최 목사님도 도시 교회로 갈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최 목사님은 “농촌목회자로서 본분을 지키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교회 활동도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철저히 내실 위주로 꾸렸습니다. 헌금을 아끼기 위해 교회 안팎의 나무 가지치기와 잔디 정리 정도는 당연히 목사님이 직접 했지요. 부흥회, 해외성지순례도 하지 않았지요. 그뿐 아니라 철야기도회도 열지 않고, 주일 예배(일요일 오전 10시)는 점심 시간 전에 끝내고 파했습니다. “철야기도하고 다음날 졸고, 교회 예배 간다고 안 믿는 식구들 점심도 안 차려주면 누가 좋아하겠냐”는 이유였습니다.
마을 일에는 적극적으로 앞장섰습니다. 인터뷰 당시 응접실 탁자에 이색적인 감사패가 놓여있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만든 감사패에는 ‘국도 23호와 지방도 643호 진·출입로 개설에 앞장섰다’는 공적 사항이 적혀 있었습니다. 도지사, 시장, 경찰서장이 드린 감사장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즐비했지요.
최 목사님은 2013년, 41년 동안 섬겼던 광석중앙감리교회 담임목사직을 은퇴했습니다. 목사님에게 기억에 남는 일을 여쭤보았습니다. 최 목사님은 ‘지팡이’와 함께 ‘재건학교’와 청소년 선도활동을 꼽으시더군요. ‘재건학교’는 1976년부터 3년간 목사님이 개설한 학교였답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에게 중학교 과정을 가르쳐 검정고시를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왔답니다. 당시 학생들이 주눅들지 않도록 멋진 교복도 만들었다지요. 목사님이 보내준 사진 속 학생들은 모두 구김살 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당시 학생들은 지금도 연락이 되는 분들이 있답니다. 또 한 가지는 소년원에 갈 청소년들을 목사님이 보증서서 ‘조건부 기소유예’로 빼내 선도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2008년 인터뷰 당시 “농촌목회를 하면서 가장 마음에 와닿은 성경 말씀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었다”며 “목회는 교회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삶인 듯합니다.
목회 일선에선 은퇴했지만 최 목사님은 요즘은 수석, 화석 수집과 전시에 열정을 쏟고 있답니다. 광석면 파출소 부근에 컨테이너 가건물로 ‘청려관’이란 전시장을 만들어 평생 수집한 수석과 화석 등 약 1000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운석(隕石)을 비롯해 암모나이트·물고기 화석과 온갖 기암괴석을 축소해놓은 듯한 돌이 전시돼 있답니다. 목사님도 “구경 오셔유” 하셨는데, 다음번엔 청려관 암석을 보러 논산을 방문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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