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한국의 피사 사탑’ 전등사 약사전

입력 2022.02.16 00:00
전등사 약사전. 가장 왼쪽 기둥들이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다. /김한수 기자

강화도 전등사(주지 여암 스님)에 400년째 조금씩 기울어가는 한국의 ‘피사 사탑(斜塔)’이 있다는 걸 아시는지요.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이야기입니다. 약사전은 전등사 대웅보전과 함께 1621년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400년 된 건물이지요. 그런데 약사전 정면에서 보면 왼쪽 기둥들이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건물 옆에서 보면 뒤쪽 기둥들이 앞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정면에서 봤을 때 ‘왼쪽 앞으로’ 살짝 기울어 있는 것이지요. 얼마 전 전등사를 찾아 총무 지불 스님의 안내로 ‘투어’를 하면서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신기했습니다. 처음부터 기울여서 짓지는 않았을테고, 서서히 기울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지불 스님은 “전등사에서 살고 있는 저희로서는 약사전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전문가들에게 문의도 해봤는데 ‘400년 동안 이 정도 기울었으면 갑자기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었다면 벌써 무너졌겠지요.

전등사 약사전 뒷편 기둥들이 앞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다. /김한수 기자

그런데 기둥이 기울어서인지 전등사 약사전 처마는 곡선미가 빼어납니다. 특히 뒤쪽 처마는 중앙부가 보통 사찰의 전각보다는 꽤 아래로 처진 것이 인공적으로는 만들기 힘든 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피사에 있는 사탑은 5.5도 정도 확 기울어있어 한눈에 봐도 불안한 느낌이지만 전등사 약사전은 그 정도는 아니고 유심히 살펴보면 기울어진 게 보입니다.

이번에 지불 스님의 안내로 경내를 둘러보면서 그동안 잘 몰랐던 전등사의 매력을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전등사는 알려진 대로 강화도의 대표적 사찰이지요. 그렇지만 아주 큰 절은 아닙니다. 발 세 개짜리 솥(鼎)을 엎어놓은 모양이라는 뜻의 ‘정족(鼎足)산성’ 혹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서린 ‘삼랑성(三郞城)’ 안에 위치한 아담한 사찰입니다. 현재 전등사의 출입문이 이 산성의 남문과 동문입니다.

하늘에서 본 삼랑성과 전등사 풍경. 구름이 걷히는 순간을 사진가 이종렬씨가 포착했다. /사진가 이종렬, 전등사 제공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81년에 아도화상이 ‘진종사(眞宗寺)’란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합니다. 이후 고려 충렬왕 때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지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전란이 발생하면 왕실과 조정의 피란처가 강화도였지요. 고려 시대의 가궐지(假闕址) 즉 임시 궁궐 터가 정족산성 안에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화재 피해도 많아서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다가 대웅보전과 약사전이 17세기초에 지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등사 대웅보전 지붕. 특이하게 수막새마다 위에 동그란 백자가 얹혀있다. /사진가 이종렬, 전등사 제공

약사전과 달리 대웅보전은 기울지 않고 400년 세월을 잘 버티고 있습니다. 대웅보전도 안팎에 볼거리가 많습니다. 우선 대웅보전 안으로 들어가기 전 지붕 위를 한 번 쳐다볼 만 합니다. 막새기와 위에 하얗고 동그란 연적 같은 물건이 하나씩 얹혀 있습니다.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물건인데요, 백자 연 봉오리입니다. 검정 기와 위에 흰 백자가 얹혀 있으니 흑백의 조화가 느껴집니다. 연 봉오리 내부에는 침(針)이 꽂혀 있어서 기와를 고정시켜주는 기능이 있다고 합니다.

전등사 대웅보전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들. 벌거벗은 채 한 손 혹은 두 손으로 지붕을 떠받치는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사진가 이종렬, 전등사 제공

대웅보전 처마 네 귀퉁이에는 유명한 나부상(裸婦像)이 지붕을 이고 있습니다. 벌거벗은 사람이 두 명은 두 손으로, 두 명은 한 손으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입니다. 이 나부상에는 전설이 있습니다. 17세기 대웅보전을 다시 지을 때 도편수에게 “같이 살자”고 꾀어 돈을 빼낸 다음 도망쳐버린 여인이 있었답니다. 도편수는 배신감에 그 여인의 형상을 만들어 네 귀퉁이에 넣었다는 것이지요.

 
전등사 대웅보전 내부. 용과 온갖 꽃들이 새겨져 있다. 불상 뒤의 불화엔 인도사람 모습의 부처님이 그려져 있다. /김한수 기자

대웅보전 내부에 들어서면 천장을 보셔야 합니다. 불상 머리 위엔 화려한 닫집이 배치됐고 천장엔 학(鶴)이 날고, 혓바닥을 길게 늘어뜨린 용(龍)이 무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가운데 온갖 꽃이 만발해 있습니다. 부처님 뒤의 탱화도 눈길을 끕니다. 그림 속 부처님은 인도 사람 얼굴을 하고 있거든요. 아마도 당시 화승(畵僧)들이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인도사람 얼굴로 그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등사 범종. 송나라 때 중국에서 만들어진 종으로 어떤 사연으로 한국에 왔는지 등이 미스테리이다. /김한수 기자

전등사 철종(鐵鐘)도 명물입니다. 송나라 때인 1097년 중국 하남성 숭명사에서 만들었다는 내용이 종에 새겨져 있답니다. 중국에서 만든 종이 어떻게 한국에 와있게 됐는지 정확한 사연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보물로 지정됐지요. 이 종이 전등사로 오게 된 내력도 흥미롭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현재 인천광역시 부평 병기창에 이 무쇠종이 있다고 연락이 와서 당시 전등사 스님이 옮겨왔다지요.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사연으로 병기창에 보관돼 있었는지도 불분명하지요. 어쨌든 보통 우리가 사찰에서 보는 범종은 청동으로 만든 것인데, 전등사 종은 한눈에도 무쇠로 만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는 깨질 위험이 있어 타종하지 않고 실제로 타종하는 범종은 따로 있습니다.

전등사 무설전 위 장독대에 놓인 술항아리. 강화도의 100년 전통 양조장에서 가져와 보존하고 있다. 막걸리 생산을 중단하려던 양조장은 다시 막걸리를 생산하고 있다. /김한수 기자

‘투어’ 중에 특이한 풍경도 보았습니다. 어른 가슴 높이만한 큰 항아리가 10여개 놓여있더군요. 100년 전통의 강화도 양조장인 ‘금풍양조’에서 가져온 것이라 했습니다. 막걸리를 빚는 양조장인데 한때 막걸리 제조를 그만두려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역사를 간직한 항아리들이 버려질 신세가 될 뻔했는데, 전등사가 “우리가 보존하겠다”고 옮겨와서 사찰에 양조장 항아리가 놓이게 됐답니다. 그 후 금풍양조는 다시 가동하게 됐고, 역사가 오래된 항아리는 다시 가져갔답니다. 항아리들 가운데에는 금이 간 부분을 기워놓은 것도 있더군요.

고려시대 가궐지에 놓인 빨간 공중전화 부스. 전등사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상징물처럼 서있다. /김한수 기자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가궐지(假闕址) 앞에 세워진 빨간 공중전화 부스입니다. 가궐지에 올라서면 정족산성 품에 안긴 전등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 전망이 가장 좋은 자리에 공중전화 부스가 놓여 있습니다. 이 부스 역시 근처 군부대에 있던 것이 부대가 없어지면서 버려지게 된 것을 옮겨와 새로 예쁘게 색칠을 해서 이 자리에 놓았답니다.

전등사는 현대미술에도 많은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전등사의 어른인 회주 장윤 스님이 현대미술에 애정이 많다고 합니다. 지난 2012년 현대식 법당인 무설전(無說殿)을 신축하면서 석가모니불과 지장·보현·문수·관음보살상을 모셨는데, 특이하게 흰색입니다. 모두 청동으로 만들었지만 일반적인 금색이 아니라 흰색을 입혔다고 합니다. 또 후불탱화는 서양의 벽화기법인 프레스코화로 제작됐습니다. 모두 현대 미술작가들에게 의뢰해 제작했답니다. 무설전의 회랑과 앞마당은 전시공간으로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또 과거 실록과 조선왕실의 족보를 보관했던 정족사고를 복원한 건물에서는 정기적으로 현대 미술작가들의 작품 전시회도 열고 있답니다.

전등사 일출 모습. 날씨가 좋은 날엔 전등사에 가까운 인천은 물론 북한산과 잠실 롯데월드타워까지 보인다고 한다. /사진가 이종렬, 전등사 제공

전등사는 최근 ‘전등사, 역사가 기억을 만들다’(비매품)란 사진집도 펴냈습니다. 사진가 이종렬씨가 거의 2년 가까이 전등사에 살면서 사계(四季)와 24시간을 모두 170여장의 사진에 담아있습니다. 전등사는 강화군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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