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희미한 옛 독서의 추억

  • 김한수 출판팀장

자정이 가까운 시간의 전철 풍경은 짐작하실 겁니다. 잠자는 취객과 큰 소리로 휴대전화 통화하는 사람, 사랑 속삭이는 연인들로 어수선했지요. 그런데 거기서 '황홀한 풍경'을 목격했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한 중년 여성이 소음과 냄새에는 아랑곳 않고 오히려 흐뭇한 표정으로 한 줄 한 줄 책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고(故) 이태석 신부의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였습니다. 그 몰입과 황홀의 표정이 신선했습니다. 저렇게 몰입해서 책 읽는 모습을 본 게 언제였던가….

초등학교 시절 첫 책 '피노키오'와 계몽사 50권짜리 동화전집을 읽었을 때, 전방부대에서 군생활하던 시절 읽었던 책들이 떠올랐습니다. 바짝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게걸스럽게 읽던 시절이었습니다. 새삼 활자와 인쇄물이 얼마나 황홀한지 절감했던 때이고요. 그때 읽었던 책을 떠올리면 지금도 표지가 눈앞에 삼삼하고 생각은 바로 그 시절로 향합니다. 누구나 이런 기억 한두 개는 있을 겁니다.

호주의 시드니대가 종이책 50만권을 폐기처분할 계획이라는 외신 보도가 있었습니다. 전자책이 늘어나면서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종이책의 미래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립니다. 한국에서도 전자책이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책의 형태가 어떻게 바뀌어도 독서의 황홀함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독서의 기억은 인생살이에 큰 힘과 위안이 될 것이고요. 독자께서는 마지막으로 황홀한 독서 경험을 한 게 언제였습니까.

(우리집 큰아이)

조선일보 2011.05.14.

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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