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비길 때 환호한다,
그들에겐 '고맙다'는 말이 없다
세상 끝 천개의 얼굴 - 미지의 세계에서 발견한 '절대 순수'
"인간이 정말로 저기까지 가서 기껏 흙 몇 바구니만 갖고 돌아온 게 사실이에요?"
보르네오 섬에서 만난 프난족(族) 족장 아시크는 저자 웨이드 데이비스에게 이렇게 묻는다. 우주인들이 달을 탐험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말이다.
국경이 사라지다시피한 세계화된 세상이지만 아직도 지구상에는 남들과 다른 상식과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미개인' '토착민'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캐나다 출신의 인류학자이자 민속식물학자인 저자는 40여년간 지구 곳곳의 오지(奧地)를 찾아다니며 만난 '문명에 때묻지 않은' 이들의 생소하지만, 의미있는 삶의 방식을 전한다.
효능을 알기 위해 직접 코카잎을 씹어먹어 보고, 아이티에선 좀비를 만드는 비밀을 캐기 위해 '보둔(부두)교' 비밀결사에도 끼어보는 등 그가 답사하고 토착민들과 함께 생활한 곳은 아마존 정글에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티베트에 이른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렸던 수준 높은 사진만으로도 흥미로운 책이다.
◇경쟁? 협동!
데이비스의 스승인 하버드대 메이버리 루이스 교수가 전한 이야기. 브라질의 아퀘샤반테족은 1년에 몇 번씩 두 팀으로 나눠 통나무를 짊어지고 초원을 가로지르는 달리기 시합을 벌인다. 첫 번째 경주에서 교수가 참여한 팀이 이겼다. 그런데 모두들 낙담한 표정이었다. 다음번 경주에선 교수의 팀이 졌다. 이번엔 상대팀도 기운이 없었다. 세 번째 경주에서 두 팀이 거의 동시에 결승점을 통과했다. 양 팀 사람들과 부족원 전체가 환호하고 난리였다. 경주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양팀이 함께 도착하는 것이었다.(41쪽)
보르네오의 프난족의 언어에는 '고맙다'는 말이 없다. 나눔은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 '그 여자' '그것'을 가리키는 말은 각각 하나씩이지만, '우리'를 가리키는 말은 여섯 가지나 된다. 나무의 이름은 수백 개 댈 수 있지만 '숲'을 가리키는 말은 없다. 이 사람들의 우주는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그늘의 땅' '풍요의 땅'이고 다른 하나는 '파괴된 땅'이다.(209쪽)
- ▲ 케냐 카라레 마을에서 결혼식을 하는 아리알 족 신부의 모습. 웨이드 데이비스는 지구 곳곳의 오지를 찾아‘문명’의 쓰나미가 닥치기 전의 풍경을 보여준다. /다빈치 제공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
캐나다 서북부 기트산족(族) 출신의 알렉스 잭이라는 노인은 부족의 신화를 무궁무진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이야기를 모두 다 하는 데 시간이 얼마쯤 걸리냐" 물었다. 노인은 "나도 아버지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이야기에 걸리는 시간을 알아본 방법은 이렇다. "부자(父子)는 얼음이 아직 단단한 때인 3월에 눈신발의 끈을 단단히 묶은 뒤 그 이야기들을 하면서 지름이 약 32㎞가량 되는 베어 호(湖)를 가로질러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까지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알렉스는 이야기의 '반도 다 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54쪽)
◇소멸돼가는 다양성
저자는 "많은 낱말과 문법으로 이루어진 언어는 인간 정신의 정수요, 각 문화의 혼이 물질세계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필터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필리핀의 하우누족은 식물 1500종을 식별해낸다. 서구 식물학자들은 400종쯤 식별한다. 그렇지만 토착민과 그들의 언어가 사라져가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보인다.
저자 데이비스는 "많은 세계가 사라져가고 많은 문화가 소멸되어간다는 것은 우리 삶의 가능성이 그만큼 더 축소되고,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보편적인 문제들에 대한 적응반응의 레퍼토리들이 그만큼 더 줄어든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사라져가는 문명과 종족, 언어를 떠나보내는 아쉬움 가득한 이별가 같은 기록들이다.
세상 끝 천개의 얼굴
웨이드 데이비스 글·사진|김훈 옮김|다빈치|320쪽|2만원
김한수 기자
조선일보 2011.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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