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읽기 - 대중의 속성]
실천의 어려움 모를 때, 대중은 격렬해진다
'거리 철학자' 호퍼, 60년 전 쓴 처녀작
대중운동과 맹신자 독하게 파헤치다…
좋은 대중운동은? 목표가 달성될 때 끝낼 줄 알아야
대중(大衆)은 바다다. 모든 것을 품고 키워주기도 하고, 어느 날 거센 파도가 되어 덮치고 할퀴기도 한다. 좌절한 개인들이 '운동(movement)'이라는 거대한 물결 앞에서 어떻게 흔들리고 움직이는가, '인터넷 20억명, 휴대전화 30억명' 등 같은 새로운 기술 문화를 공유하는 엄청난 대중의 탄생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함께 살펴본다.
맹신자들
에릭 호퍼 지음|이민아 옮김|궁리|256쪽|1만3000원
인간 세상의 속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일까. 60년이 지났지만 책이 말하는 내용은 현재형이다.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는 에릭 호퍼(Hoffer·1902~1983)가 '맹신자들'(원제:The True Believer)을 쓴 것은 딱 60년 전인 1951년이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금광 노동자, 레스토랑 웨이터 등을 전전하던 그는 샌프란시스코 부두 노동자로 일하던 시절 처녀작으로 이 책을 발표했다.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스탈린의 소련 전체주의의 폐해를 목격한 그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대중운동(mass movement)'의 속성을 파헤친다. 또한 '숭고한 대의에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광신적 신념가, 즉 맹신자를 분석한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은 선동에 취약하다. 호퍼는 독설로 그 생리를 까발린다.
◆개인 vs 대중
호퍼는 대중운동이 자랄 수 있는 토양으로 우선 개인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상황을 꼽는다. 철저히 좌절한 개인들이 "쓸모없는 자신에 대한 강한 혐오와 그 감정을 잊고 위장하고 벗어던지고 없애버리고자 하는 욕구가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고자 하는 의지를 낳으며 결속력 높은 집단 속에서 자기를 잊고자 하는 의지를 낳는"(93쪽) 것이다. 맹신자들은 대개 남의 일에 관심이 많다. "남의 일에 신경 쓰는 것은(…) 공동체나 국가, 인종 문제에 대한 열띤 관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기 문제는 회피하면서 이웃의 어깨에 매달리든 목을 조르려고 덤벼들든 하는 것이다."(32쪽) 또한 그들은 "자기네가 떠맡은 그 거대한 임무에 수반되는 어려움은 전혀 알지 못해야 한다. 이들에게 경험은 장애가 된다. 잉글랜드인들이 대중운동에 소심한 것도 어쩌면 앞선 정치적 경험 때문일 것이다."(28쪽)
- ▲ 에릭 호퍼는“불평불만은 문제가 시정될 수 있을 것 같을 때 가장 신랄하다”며“입에 풀칠하기 위해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노동하는 사람들은 불평불만도, 꿈도 키우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진은 기계 부속품 같은‘군중’으로 전락한 북한 학생들이 보여주는 집단체조‘아리랑’모습. /ⓒ Keren Su / Corbis
어떤 사람들이 맹신자가 되는가. 호퍼는 "좋았던 시절의 기억으로 피가 끓는 신빈곤층"을 우선 꼽는다. 영국의 청교도혁명,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무너진 중산층 출신 빈민들이 그랬다. 또한 "불평불만은 문제가 시정될 수 있을 것 같을 때 가장 신랄하다."(51쪽) 대중운동은 또한 가족 붕괴를 조장한다. "가족이 붕괴하면, 그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자동적으로 집단의식이 생겨나고 대중운동의 호소에 귀 기울이게 되는 것"(62쪽)이다. 히틀러 역시 독일 국민과 유대인들에 대해 동시에 가족 붕괴를 유도했다.
이런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대중을 미래라는 희망에 마취시키면서 그것을 현재의 즐거움이라고 믿게끔 현혹"(34쪽)하게 되면 대중운동은 본격적으로 싹을 틔우게 된다.
◆과거, 현재, 미래
호퍼는 보수주의자, 회의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세 부류는 모두 "현재를 소중히 여긴다"(112쪽)고 말한다. 보수주의자는 미래를 현재 모습대로 만들려고 하고, 회의주의자는 '현재는 지금까지 있었던 것과 앞으로 있을 모든 것의 총합'으로 보며, 자유주의자는 '현재를 못쓰게 만드는 것은 미래를 불구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급진주의자와 수구주의자는 전혀 달라 보이지만 위험한 공통점이 있다. 현재를 혐오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보는 현재는 일탈이요 기형이다. 급진주의는 인간의 본성이 무궁무진하게 완전해질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수구주의는 인간에게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113쪽) 더욱 위험한 상황은 수구주의와 급진주의가 뒤섞이는 경우.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는 동시에 전무후무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114쪽)하기 때문이다.
◆좋은 대중운동
호퍼는 대중운동의 초석을 놓는 것은 지식인, 실현자는 광신자, 굳건히 다지는 것은 실천적인 행동가라고 말한다. 대중운동의 산파인 지식인들이 대부분 비극적 최후를 맞는 것은 "그들이 개인주의자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기 때문"(207쪽)이다. "광신자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대부분은 창조적이지 못한 지식층에서 나온다. 지식인 계층을 나누는 가장 중대한 기준은 창조적인 작업에서 성취감을 얻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이다. 창조적인 지식인은 현 체제를 아무리 통렬하게 비판하고 비웃어도 실상은 현재에 애착을 갖고 있다. 그의 열정은 개혁이지 파괴가 아니다. 대중운동이 자신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할 때면, 그것을 온건한 일로 바꾸어놓는다."(210쪽)
그렇다면 좋은 대중운동은? 적절한 시기에 끝내는 것이다. 호퍼는 "링컨과 간디 같은 불세출한 지도자는 대중운동의 나쁜 속성을 억누를 뿐만 아니라 목표한 바가 어느 정도 달성되면 운동에 기꺼이 종지부를 찍는다"(232쪽)고 강조한다. 그래야 "정체된 사회를 각성시키고 혁신하는 요인이 되는"(237쪽) 대중운동의 긍정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한수 출판팀장
조선일보 201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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