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만든 길, 그러나 스스로 진화한다
길은 다니는 이를 가리는 법이 없지만 사람은 길을 지배하고 권력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길은 첨예한 정치적 갈등의 상징이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도구이며 질병의 중개인이기도 하다.
미국의 논픽션 작가인 저자는 2003~ 2007년 사이 전 세계 6종류의 길을 주제별로 답사했다. 모두 이 시대 지구촌 변화의 풍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길들이다. 마호가니 원목을 벌목해 나르는 페루의 자원루트(1부 욕망의 길), 인도 북부 은둔의 땅 라다크-잔스카르(2부 변화의 길), 케냐 몸바사~우간다 캄팔라에 이르는 동아프리카(3부 위험한 길), 이스라엘~팔레스타인(4부 증오의 길), 중국 베이징~싼샤댐(5부 번영의 길), 나이지리아 라고스 시내의 고속도로(6부 혼돈의 길) 등이다. 모두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었고, 저자는 현지인이 운전하는 차에 편승했다. 좀더 현실의 길을 다녀본 것이다. 정보화 시대에 육로를 택한 것은 "도로는 비(非)가상세계의 필수 연결망으로 남아 있다. 도로는 인간의 노력이 오가는 길"(11쪽)이기 때문이다. 덕택에 책은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 펼치는 르포이자 일종의 명상록으로 읽힌다.
- ▲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1990년대 첫 방문 이후 11년 만에 다시 찾은 케냐, 우간다 등 동아프리카는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 물론 근본적인 변화는 아직 멀었다. 가령 저자는 케냐에서 우간다로 가면서 2개의 차선 중 유독 서쪽 방향 차로만 깊게 팬 흔적을 발견하고 운전자에게 "한쪽 차선에만 항상 차량이 몰리는 걸까?"라고 묻는다. 돌아온 답은 "아, 보통 돌아올 때는 차가 비니까요"(223쪽)이다.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 도착한 수입품을 서쪽 내륙으로 실어나를 뿐, 서쪽에서 동쪽 항구로 옮길 수출품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긍정적 변화도 감지된다. 에이즈에 대한 경각심의 확산과 시민의식에 눈떠가고 있다. 저자는 케냐-우간다 국경을 넘으려다 현지 경찰에 소총으로 위협을 당하면서 500실링(약 7.5달러)을 강탈당했다. '싸게 막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운전자는 경찰서로 서장을 찾아가 따져서 결국 돈을 받아내고 비리경찰의 옷을 벗겼다. "이런 일을 참아 넘기면 안 된다"고 흥분하는 운전사를 보면서 '음중구'(스와힐리어로 '백인') 편승자는 "감탄스러웠다"고 적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길은 단절되고 분리된 길이다. 검문소는 사람과 차량의 통행을 가로막았고, 이스라엘 국민이 다니는 길은 협곡을 가로지른 다리와 고가로 연결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마을을 연결하는 길은 그 아래에 꼬불꼬불 이어지기도 한다. 증오 때문이다. 저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길게 줄 서서 검문소를 통과해 보고, 이스라엘 군인과 함께 팔레스타인 마을을 순찰해 봤다. 검문소에선 사소한 일 때문에 갇혔다가 풀려났고, 순찰 때는 유리병에 든 엔진오일 세례를 받기도 했다. 결국 양측 모두 피해자이고, 가해자였다. "분리장벽의 건널목이나 영토 내 전략적 요지에서 검문소는 점령 현실을 인간의 얼굴로 시현한다. 이 현장은 여느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만나는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그 얼굴이 우호적일 때는 거의 없다."(289쪽)
저자가 베이징~싼샤댐 구간에서 편승한 차는 현대의 '투싼'이다. 최근 경제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자영업자, 방송사PD, IT업체 CEO, 항공사 간부, 법률회사 파트너 등이 자동차 여행 클럽을 조직해 떠난 1주일짜리 여행이었다. 이들 벼락부자들이 고속도로 갓길로 추월하면서 마구 달릴 때 속도를 늦추게 하는 것은 길을 막고 농민들이 널어놓은 옥수수였다. 그들은 빈부차에 대해 그렇게 소극적인 대항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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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코노버 지음|박혜원 옮김 | 21세기북스|519쪽|1만9800원
김한수 출판팀장(우리 큰애)
조선일보 201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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