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할배의 화두


글: 사투리


돌각담 외갓집 앞개울은 어릴 적 이종(姨從)과 나의 놀이터였다. 외조부는 두렵고 외조모도 없는 오두막일 망정 우린 거기가 그냥 좋았으니까. 봄방학이 끝나갈 무렵, 썩얼음 조각을 날리는 장난에 빠져 까불대던 이종과 나는 하필 시장을 다녀오시던 외조부 면상에다 얼음 조각을 날리고 말았다.

“네 이놈들! 조오심 없이!”

어른님 음성은 노여움이었다. 젊어서 영천장(永川場) ‘총각 대방(청년 자치 대장)’으로 장터의 말썽꾼을 끌어다 매타작을 안기던 어른을 건드렸으니 불알이 오그라들 밖에. 용서를 비는 뜻을 담아 우린,

“외할배 장에 다녀오십니까.”라며 아양을 섞어 입을 모았지만, 술기운이 불콰한 당신께서는,

“이 번지러운 놈들아! 외할밴동 수박할밴동 모르겠다만 이리 좀 따라오너라 보자!” 하시는 게 아닌가. 갑자기 웬 ‘수박할배’?

워낙 무서운 분이라 자라목을 한 채 불호령을 기다렸는데, 뜻밖에도 외할아버지 주머니에선 눈깔사탕 한 봉지가 나오는 것이었다. ‘매찜질 대신에 사탕 봉지라니? 참 이상스럽다.’ 싶어 갸웃거리는 중에 갑자기,

“회초리를 맞을래? 아니면 밥 한 사발이 몇 숟가락인지 세어 볼래?”라며 선문답 같은 화두(話頭)를 던지셨다. 겁에 질린 우리는 후자를 택했고, 당신께선 “사탕 봉질랑은 해답을 얻고 나서 뜯도록 해라.”시며 선행 조건에다 못을 박았다.

왕사탕 한 알조차 오감하던 시절에 ‘온 봉지’라니! 난 속으로 ‘땡 잡았다. 까짓 것쯤이야!’ 싶어 꼴깍 침을 삼켰다. 그런데 어쩐 영문인지 저녁밥을 들고 앉으니까 네댓 숟갈까지만 세어졌달 뿐 맥없이 중동이 끊어졌다. 몇까지 세었더라? 새로 시작하긴 틀렸은즉 어쩐다지?



얼마나 달콤한 눈깔사탕인데....... 하지만 썩얼음 까닭의 죄밑이라 차마 시렁 위의 눈깔사탕쪽으론 눈길조차 보내지 못했다. 마음이 사탕한테 귀양을 갔으니 밥숟갈이 세어질 리가 만무했다. 이종도 마찬가진 모양이었다.

사실, 잔꾀를 피워 사탕을 깨물어 먹을 수도 있었는 바, 이를테면 댓가지로 산(算)을 놓거나, 아예 밥 사발을 엎었다가 한 숟갈씩 퍼담아도 되었겠지만 ‘밥 자체’가 경외의 대상인 까닭에 그 건 불가능했다. 항차 어린것이 산 가지를 놓을 수야 더더욱 없는 일이었고.

목젖이 늘어진 채 속절없이 밤을 보낸 이튿날도 이종과 나는 예닐곱까지밖에 더는 세지 못한 채 짧은 봄방학이 끝나고 말았다. 그걸 세는 녀석은 ‘장래가 촉망된다’고 외조부가 덧붙이며 부추겼는데도 말이다. 시렁 위의 알사탕은 결국 마른침만 강요하는 유혹이었다.

그게 어찌 그토록 어려웠을까? 배고픔 탓에 허겁지겁 퍼먹느라고? 아니면 개구쟁이 관심이란 게 자꾸 옮겨 다니는 속성 때문에? 밥을 먹는 동안 다른 생각일랑 철저히 끊고 밥숟가락 숫자에만 정신을 집중시켜야 하기에 힘든 노릇이었을까? 잠시라도 생각이 산만해지면 하릴없이 셈의 허리가 뚝 끊어졌으니. 개구쟁이에게 부족한 건 집중력이었다.


진달래가 필 무렵까지도 ‘수박할배의 화두’는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게 왜 마냥 맴돌았는지 나도 모른다. 참 어줍잖은 게 그토록 힘들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거들랑 독자 스스로를 한 번 시험해 보시라. 제대로 헤아려 낸 뚝심이라면 ‘장래가 촉망됨’을 자부해도 좋을지니!

실토하지만 수학여행 길에까지 나는 그 화두를 멍에처럼 지고 다니면서도 절실하게 천착하질 못했는데, 여관집 공깃밥이란 걸 닥닥 긁다 말고 그게 모두 5 숟갈에도 못 미치는 탓에, 조개 하나 까먹은 황새 짝에 불과하다 싶을 때에야 화들짝 깨닫고서 무릎을 쳤다.

산만한 외손(外孫)들의 ‘집중력’을 키워 주시려고 외조부가 던지신 화두의 뜻을 알아차린 건, 공깃밥을 거푸 3 개나 퍼먹고도 아직 좀 ‘나쁘다’는 기분에 젖을 때였다.

왜 그 생각을 미쳐 못했을꼬? 한 사발의 밥이 몇 공기쯤 되는가를? 3 x 4는 12이고 3 x 5는 15인데. 무작정 하나씩만 셈하려 들지 말고, 늘품 있게 몇으로 나누었다가 나중에 곱하면 되는 묘미를.

아, 꿈에라도 달려가서 안기고 싶은 고향이여! 뺨이라도 부비고 싶은 따사롭던 돌각담이여!

 

 

월간 '에세이'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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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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