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에누리 좀 하쟀다가



부모님에겐 천금같은 소를 때마다 팔아서 공부랍시고 마쳤건만 대학 졸업자는 넘치고 일자리가 없던 시절이라 취업을 못해 안달하던총각이, 운 좋게 한 기업체 공채 1기생으로 뽑혔으나 재정보증 때문에 헤매는 통에, 닷새나 늦게사 인천 공장에 부임신고를 하고 보니 입사동기들의 오리엔테이션은 벌써 끝나버린 뒤였다. 오리엔테이션도 없이 학생 기분에 젖은 채 산업현장으로 직행했더니 담당 계장의 과제가 며칠째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요 속엔 노고지리가 ㅃㅃㅃ

그건 무려 12쪽에 달하는 깨알같은 원문이었는데, 힐끗 훑어보니 제목부터 도통 모를 소린 데다가 문장도 교과서와 달리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근엄한 계장께서는,

“늦었구먼, 기다렸는데.... 오늘 해 지기 전에 이걸 12번 읽도록 하시게.”

라고 바위 같이 명령했다.

하지만 무슨 수로 이걸 12번씩이나? 낯선 단어 찾는 데만 반나절이 걸릴 텐데 12번씩 읽으라니? 명령치고는 실행 불가능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새까만 신입사원한테 이렇듯 무리한 명령을 해도 되남? 유행가 말마따나 에누리없는 장사가 어디 있어?’ 싶은 생각이 들자 학생 신분인 줄 착각한 나는 교수님을 상대로 응석을 부리듯,

“헤헤, 흠흠, 계장님! 7번까지는 읽어보겠습니다만 12번은 도저히........”

장난기 섞어 썰렁한 얘기를 날리자,

‘오냐, 그래, 자네 맘대로...... 7번만 읽으시게나.’

하며 웃는 낯으로 받아 주리라 기대했는데 웬걸? 이쪽의 장난스러움을 저쪽의 정색이 깔아뭉개는 묘한 순간. 그의 입술은 경련을 일으켰고 눈은 잡아먹을 듯 도끼눈으로 변했다. ‘주는 대로 먹고 나오는 대로 지껄인’ 철딱서니 없는 수습사원의 한 마디가 그토록 노여웠던가 보다.

12번 아니라 100번이라도 ‘까라면 까는 식’의 군사문화가 판치던 세월에 ‘어긋난 깻벌거지가 모로 기며’ 언감생심 12번을 7번으로 깎으려 들었으니 여기가 어디 도둑놈 뒷전인 줄 아남? 그는 이 시건방진 철부지를 갋을 셈이었던가 보다.

가부간에 나의 헤헤거림은 ‘천지를 모르고 깨춤을 춘’ 격이었다. 간이 퉁퉁 부은 햇병아리가 독수리에게 덤벼든 치기(稚氣)라니? 직속 상사의 명령, 그것도 첫 번째 명령에 반기를 들었으매 조직에 살아남긴 틀린 노릇이었다. 나의 돌출 언행이 회사 안에 어떤 공론을 돌게 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가 주먹을 휘둘러 내 아귀통을 돌리는 대신, 징계위원회에서 ‘호랑이 새끼를 기르느니 일찍 도태시킴만 같지 못하다’고 논의 됐음 직한 바, 따 놓은 당상이던 ‘취직’이 다홍치마 첫날밤도 못 넘기고 ‘징계 파면’으로 치닫는 찰나였다. 이젠 팔아 치울 소도 없으니 낙향해서 손가락이나 빨까 보다......

다행스레 ‘학생 티를 못 벗었달 뿐 악의는 없었다’는 구실 덕분에 파면의 위기를 모면했지만, 그로써 나에겐 코피 터지는 다양한 분량의 신참 훈련이 산지사방에서 눈물을 강요했다. 우리 계장은 지능적으로 호된 담금질을 나에게 안겨 왔다. 그는 기숙사에서조차 날밤을 밝히게끔 각가지 업무 숙제로 나를 옥죄었다. 더구나 다른 간부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고 가끔 힐난과 골탕조차 섞도록 부추겼다.

하지만,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 했던가? 수습사원 시기에 겪은 그 무서운 시련 덕분에 나는 일에 파묻혀 사는 일 벌레가 되었으니, 지금 와서 보면 오히려 우리 계장님께 감사를 드려야 마땅한 일이다. 그 뜨겁고 쓰라리던 담금질이 나를 철들게 했을 뿐더러, 청춘을 불사른 30 년 세월에 첨에는 조그맣던 기업도 일취월장해 10대 그룹으로 발돋움하는 걸 지켰으니.

사회의 새내기들이여!

학생 티는 빨리 벗을수록 성숙해진다. 소신 껏이야 좋지만 치졸한 언행은 삼가는 게 이롭고, 넘고처지지 않으면 더더욱 귀염받을 터인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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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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