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반 박자 외도(外道)



굽돌아진 에움길 멀찍이서 대여섯이 아이들이 무슨 놀음엔지 깊이 빠진 듯하여 무얼 하나 지켜봤더니, 모퉁이를 줄줄이 돌아 나오는 승용차의 앞머리만 보고서 그게 몇 년형 현대 차인지 어느 회사 무슨 차종인지 내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로선 척척 알아맞히는 걔들의 눈썰미가 어쩌면 저토록 야무질까 싶어 혀가 내둘러졌다. 그런 뒤로는 기회 닿는 대로 코밑이 거뭇하기 시작하는 녀석들에게, 재미 삼아 산새[野鳥] 이름을 아는 대로 읊어보라며 부추기곤 했는데, 대략 여남은 가지쯤에서 그칠 뿐 스무 가지를 넘는 녀석이 드물었다.

하기사 몇몇 산새 이름쯤 모른다고 일류학교에 못 들어갈 것도 아닐 텐데 그게 뭐가 그리 대수냘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런 독자시라면 주저 말고 여기서 책장을 덮는 게 좋을 게다. 다만 그러기 앞서 딱 한 가지만 묻고 넘어가자. 개돼지조차도 어미 혼자 새끼를 거뜬히 낳는데 반해, ‘산모가 분만한 신생아의 탯줄을 어찌 자르는지?’를.

동고비가 까치밥으로 남겨둔 감 위에 앉아


요 속에 산새 소리가.......

승용차의 형식이라면 수입 차종까지도 꿀릴 게 없는 애들이 흔한 산새 이름조차 모른다는 건 대단한 수치다. 이건 덮어놓고 ‘자연보호’만 외치게 한 구호 탓도 있음 직하다. 어찌, 산새뿐이랴. 들꽃[野生花]은 물론, ‘송사리’라면 ‘잔챙이 고기’로 알 뿐, 수면(水面)에 떨어지는 벌레를 주워먹는 눈이 커다란 어류의 한 과(科)인 줄도 모르는 애들이 얼만데?

이렇듯 ‘이름 모르는 꽃과 이름 모를 새, 이름 모를 나비와 물고기’가 판을 치는 건 어른들의 자질과 무관하지 않을 성싶다. 저토록 무서운 눈썰미를 지닌 애들이기에 생태계를 한번만 눈여겨보도록 해주면 족할 터인데도...... 어미가 모르니 어찌 애들한테 가르쳐 줄 수 있을까보냐?

산천에 서식하는 동식물을 통해 생태계에 대한 애정을 싹틔울 것은 물론, 그로써 우리가 ‘살아 있는 기쁨’을 누릴 수도 있을진데, 상실의 아쉬움을 터득하는 성찰의 기회가 있어야겠다. 이를 위해 아주 유용함 직한 비디오(VCR)가 한집 건너씩 있다지만, 생태계를 이해하는데 쓰기는커녕 오히려 요상한 것이나 틀기에 바쁜 건 자성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은밀한 숲속, 오솔길의 안쪽이나 엿보기로 하자.

가랑잎 바탕에 깜장 줄이 쳐진 ‘다람쥐 무늬’가 보호색으로는 으뜸일 게다. 왠고하니, 멧돼지 새끼를 비롯해서 꺼병이까지도 갓 태어날 땐 다람쥐 무늬를 띄고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운수 좋은 큰머슴이 멧돼지 새끼를 사로잡아 구정물일망정 배불리만 먹이면 잘도 따르는데 반하여, 보호색이 동류항인 꺼병이를 ‘어리’ 속에 가둔 뒤 밤 자고 나면 어디론가 새어버리곤 해, 그놈을 붙잡아온 꼴머슴으로 하여금 일쑤로 허망을 맛보게 했다. 멧돝 새끼는 사람에게 잘 순치(馴致)되는 반면, 살가운 꺼병이는 틈새만 있으면 빠져나가는 데 명수다.

이로써 제물에 화가 치민 꼴머슴이, 꺼병이를 어레미 속에 가둬 놓고는 모이랍시고 좁쌀을 줬나 본데, 도망칠 속셈으로 밤새 삐악거리는 줄 알았더니 새벽녘엔 사늘하게 식고 말았더란다. 나중에 알고 본즉 ‘꿩 새끼’는 좁쌀이나 주워 먹는 체질이 아니라, 어릴 때는 메뚜기처럼 살아서 꼼지락거리는 벌레만 잡아먹는 육식성이니까 그랬던 것을......

이렇듯 야성을 길들임에 있어 멧돝과 꺼병이는 타고난 심성부터 엄청나게 다른 족속이다. 그래서 “꿩새끼(꺼병이) 키워 봤자 제 길로 간다.”는 체념 섞인 속담이 생겼나 보다. 그런데, 멧돝은 ‘제길’을 버린 채 ‘엇길’로 접어든 줄도 모르고, 그저 허기나 면해보려고 개숫물에 매달리고 있음은, 월급날만 기다리는 속 빈 봉급쟁이와 뭐가 다를까보냐.

숲 속의 소동물들만 다니는 ‘토끼길’을 조도(鳥道)라고도 일컫는데, 거기 찢긴 소나무 가지에선 진액이 흐른다. 그런데, 멧돼지가 선불을 맞을라치면 상처를 얼음 구멍에 담가 식힌 다음, 다친 부위에다 그 송진을 문지르는 지혜가 있으니, 이게 바로 ‘오솔길’이 멧돝에게 베푸는 은혤런가. 또 생채기가 난 꿩조차도 송진을 발라 고착시키는 슬기를 지녔다니 엄청난 놀라움이다. 찢긴 소나무는 송진을 흘림으로써, 다친 동물은 그걸 바름으로써 상한 몸을 스스로 치료해 낸다니....... 이래서 자연은 참으로 경외(驚畏)로운 스승임에도 우린 그걸 번히 보고도 깨우칠 줄 모르는 당달봉사일 뿐이다. 우리가 더 이상 밤눈 어두운 약빠른 고양이 신세를 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지구상의 복잡다기한 현상(現象)에 대한 주된 지배자는 인간일까 자연일까? 또 존재하는 수많은 형상(形象) 가운데 ‘직선적 요소’와 ‘곡선적 요소’는 어느 쪽이 더 성할까?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곧은 길[直線]과 굽은 길[曲線], 큰길과 샛길, 곁길과 지름길 등 별의별 ‘길’이 있게 마련이다. 어떻든 곡직(曲直)만 놓고 따지면 거개가 곧은 것이 굽은 것에 우선한다고들 주장할 테지만, 그게 과연 보편 타당한 것일까?

토목(土木)기사가 태산준령에다 ‘터널’을 뚫을 때, 수준의(水準儀)를 차려놓고 완전히 수평(水平)되게 긴긴 땅굴을 굴착해 놓고 보았더니, 웬일로 터널 한복판에 지하수가 흥건히 고이더란다. 왜 그런지 곰곰이 알아봤더니 기하학적으로 지나치게 수평되게 팠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터널은 언제나 배가 좀 부르도록 파나가는 게 자연에 순응하는 길이다. 이것이 쪽 곧은길만 옳다고 우기는 아집의 모순을 지적하는 본보길 게다.

올바른 길을 제길[正道]이라 한다면 빗나간 길은 곁길[邪道] 또는 엇길이랄 수 있다. 또한 ‘곁길’은 외도(外道)와 상통하는 바, 이는 흔히 노는 계집과 상종하는 걸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들 사이에도 외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튀기 즉 간생종이란 게 있으니, 말과 당나귀의 간생종(間生種)인 노새나, 호랑이와 사자의 간생종에겐 생식능력(生殖能力)이 없는 반면, 멧돝과 집돝의 튀기는 새끼를 낳아서 잘도 기른다. 허술한 우리를 뛰쳐나간 집돼지가 멧돼지와 어울려 깜장 집돼지 새끼를 낳아서는 칡뿌리를 파먹는 광경이, 경북 칠곡에서 관찰됐다는 보고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미물인 토끼족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땅굴을 파는 ‘굴토끼’와 계절 따라 털빛이 바뀌는 ‘산토끼’는 같은 토족(兎族)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교배가 되지 않는다니 전생부터 연(緣)이 닿지 않게 점지됐음일까. 흑인, 백인 및 황인종 사이에선 튀기가 태어나는데도 불구하고, 피부 색깔을 둔 인종분규가 세계도처에서 그치지 않음은 어인 탓일까?

날짐승 가운데 유독 뻐꾸기 무리는 제 둥지를 손수 틀지 않고, 멧새나 딱새, 개개비 등의 보금자리에 몰래 알을 낳는 얌채족인데, 도무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단 몇십 초 사이에 그 짓[託卵]을 끝내는 건 놀라움이다. 그건 은밀한 말초적 쾌락만 저희끼리 실카장 나눈 다음, 그로써 태어난 새끼에 대한 어미로서의 책무는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치는 짓거리다. 핏덩이를 개구멍에다 버리는 미혼모들이 하필 저 뻐꾸기 족속을 닮았을까 싶어 애닯다. 그런 미혼모는 갓난아기의 탯줄은 어찌 잘랐을지 몰라? 그 엇부루기 송아지 주재에 ‘양쪽을 묶고 가운데를 자르는 줄’을 제대로 알고나 있었는지!

다양화 사회, 다변화 사회, 다극화 사회에서 다소나마 넉넉함을 누리려면 잠시 갓길 쪽을 넘나드는 여유쯤 가져봄 직하다. 사노라면, 쪽 곧은 길 보다는 어쩐지 좀 구부러진 길에 정이 가는 걸 어쩔 수 없다. 사냥꾼이 모자를 써도 약간 비뚜로 쓰고, 누나의 가르마도 빼딱 가르마가 훨씬 멋있어 뵈고, 노래를 불러도 반주보다 반 박자쯤 어긋나게 부르는 신멋을 피울 때 능숙한 가락이 뽑아져 나오듯이 말이다.

또 곧이곧대로 사는 사람 치고, 늘품수 있는 화상도 흔치않는 법이어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란 유행어가 생겼나보다. 이래서 곧은길보다는 돌아가는 길에 잔재미가 숨어 있을 듯 싶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샛길에만 옴팍 빠져, ‘혼삿말 하는데 장삿말’을 하거나, ‘자다가 봉창 두드릴’ 지경이면 손목 잡고 말려야 마땅할 게다. ‘먹을 불콩인지 못 먹을 노간주 열맨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지.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기에 준비 없이 떠날 수록 환희롭다. 궤도 이탈의 순간적 희열과 회귀(回歸)의 미학을 음미하는 건 엇길의 여유다. 곁길의 재미가 달콤할지라도 ‘첩의 정은 삼 년이요 본처 정은 백년이라’ 했으니, 변주곡에 시들해지면 주제로 돌아오는 건 시간 문제다. 따라서 외도에 오래 탐닉하지 않는 게 선비의 길일진저.

그렇지만, 반도체라면 밥 싸들고 나서는 화학자, 의학을 전공한 뒤 변호사로 개업한 법조인, 정신분석학을 정치학에 접목시킨 의사, 이런 양수 겹장식 외도의 사례 즉 생식능력을 갖춘 간생종의 탄생이, 밥충이 인생보다 곁길의 재미를 만끽하는 앞선 생각의 본보기다. 직무와 취미가 일치할 수 있는 사람은 엄청나게 선택받은 존재다. 그렇지 못할 땐 취미생활이 업무와 동떨어진 것일 수록 신나는 구석을 찾을 수 있음은 당연하다

일부러 반 박자쯤 어긋나게 부르는 노래의 멋. 그게 어쩜 우리가 누리고 싶은 외도의 멋일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은밀한 숲 속의 오솔길에는 오늘도 살아있는 재미가 흘러 넘칠 터이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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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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