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몰라도 돼?

창작 수필 2005. 3. 22. 06:52

단상 (몰라도 돼?)

이를테면, “엄마. 저게 무슨 새야?” 하는 호기심에 찬 개구장이의 질문에, 모른다고 털어놓을 용기가 없어, “야, 그런 건 몰라도 되!”하며 나무라는 투의 어미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겉으로만 “자연과 친하라.”거나, “자연 사랑이 어쩌고......” 떠들 것이 아니라, 주위에 흔한 동식물 이름쯤은 알아두고 넘어갔으면 좋으련만...... 세상의 어미 아비들에게 그런 능력이 없으면, TV나 보도 매체라도 발벗고 맡아주면 오죽이나 좋을까만.

지켜 보고 있으면 움직이는 새

덫에 걸린 짐승 치고 접근하는 사람을 잡아먹을 듯 악쓰지 않는 놈이 없는 법인데, 이빨을 갈며 눈에 불을 켜고 덤빌 듯한 늑대족은 오히려 멀건히 쳐다본다니 참 뜻밖이다. 덫에 치인 늑대는 포로가 된 걸 자각하면 금방 체념하는 까닭에, 사냥꾼들로 하여금 감탄에 젖게 한단다. 따라서 경험 많은 엽사들은 그토록 양순해진 녀석을 데려다 순치시킬 엄두를 내게끔 되었고, 그놈에게 애정을 퍼부은 나머지 ?개(犬)?란 가축으로 길들일 수 있었다. ‘뛰어 봤자 벼룩’이라고 믿어지는 정황이라면, 까짓 것 혀를 깨물고 얼른 자진(自盡)을 하든가, 아니면 헛된 발버둥 대신 현실을 현실답게 수용하는 자세가 바로 늑대족이 터득한 지혜랄 수 있다.

야조(野鳥)인 노고지리(종다리)와 양조(洋鳥)인 카나리아는 본디부터 명창으로 태어난 성싶지만, 실재론 그와 반대다. 조롱 속에서 키운 놈은 지저귈 줄 모른다. 단지 유창한 어미의 노래나, 녹음된 고운 새소릴 들을 수 있는 귀와 그럴 소양을 갖췄달 따름이다. 이들에게 지저귀는 솜씨를 가르치려면, 듣기의 반복 교육을 통하는 게 제격인데, 제법 지저귀기를 익힌 연후엔 한 조롱 속에다 합거(合居)시키는 게 좋아 뵐지 모르지만, 암수를 함께 두면 도리어 제잘거리길 포기해 버린다. 왠고하니, 암수가 한 지붕 밑에 산다는 그 자체로써 애타는 그리움이 없어졌으므로다. 따라서 암수를 별개의 조롱에 나눠 넣고, 수놈이 까치발을 딛고서 목을 빼면 보일락 말락한 높이에 암놈 조롱을 매다는 것이 수놈이 목청껏 지저귀게 하는 비결이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멀리 떨어질수록 애타게 그리워지는 건 동물과 사람이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서울 대공원의 굶주린 여우에게 날고기를 줄라치면 냉큼 먹어치우지 않고 꼭 땅에 파묻어 두었다가 콤콤하게 삭은 뒤에사 파먹곤 하는 걸 관찰한 적이 있는데, 그건 필경 여우가 꾀박이답게 썩은 고기의 곰삭은 맛을 터득하고 있음을 뜻한다. 한편 야생 여우들은 먹을 게 생기면 딴놈이 입대지 못하게 오줌을 깔기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들여우는 이른바 ‘침바르기’를 잘하는 동물이다. 그런데 인간 가운데도 ‘겨울 염소처럼’ 아무 일에나 참견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남의 소유물에까지 침바르기를 일삼는 파렴치한이 없지 않다. 그런 화상(和尙)은 그 지나친 이기심 때문에 상종(相從)할 가치를 상실하므로써 제손으로 제눈 찌르기를 함에 다름 아니다.

흔히들 게<蟹>의 모걸음질을 두고, ?곁길?로 간다고들 비웃지만, 게들로서는 그게 분명 ?제길?로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스런 잣대로 보기 때문에 그런 소릴 한다. 가재나 징거미새우가 뒷걸음질치는 것도 또한 같다. 예서 우리는 뭔가를 간과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아무튼 ?바람풍?보다는 ?바담풍?하는 혀짤배기 소리가 조금은 재미난 구석이 있으니까다. 그건 아직도 모든 정직한 사람이 대우받는 그럴싸한 세상이 도래하지 않음과 무관하지 않다.

초식 동물인 양이나 사슴 무리의 새끼들은 세상에 떨어져 털이 마르기 바쁘게 홀로서기를 하며, 곧이어 걸을 수 있는데도, 인간은 결코 그렇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렸을 때 쉽사리 걸었던 것으로 착각하는 일이 적지 않다. 사실 돌잡이 아길쩍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 끝에야 비로소 홀로서기를 할 수 있었던가. 따로서기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생각과 행동 사이의 괴리(乖離)를 비로소 체험하게 된다. 비록 돌잡이 아기라도 마음은 곧장 따로 서고 싶겠지만, 홀로 서 보겠다는 그 모험심 앞에 얼마나 많은 주저앉기를 당해야 했으며, 뒤통수를 방바닥에 찧는 고난을 되풀이했더란 말인가. 이렇게 콩닥거리며 넘어지기를 거듭하는 수순(數順)을 거친 다음에야 어렵사리 첫발을 뗄 수 있었던 걸 우리는 일쑤 잊고 지내왔다. 그래서 선대들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다.”고 나무라는 속담을 만들었나 보다.

아이들 치고 전자 오락실이나 만화 가게에 들리지 않는 애가 있을까 몰라?

앞서 말한 조도의 폭은 토끼 머리가 들어갈 만하면 된다고 해서, 자전거 길의 폭도 5 센티미터면 넉넉하달 수 있을까? 그게 5 센티미터라면 미상불 능숙한 곡예사나 지나갈 길일뿐이지. 뭇 자전거가 지나다닐 길이라면 적어도 되돌아갈 여유는 있어야 할 게다. 그 정도의 여유를 가지지 못함이 오늘을 살기 바쁜 우리를 만들고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는 외길 인생은 쓸쓸하고 고된 길일 게다. 남들이 흔히 가지 않는 길, 진정 외로운 길을 수십 년 걸어가는 어르신은 존경받아 마땅한데, 그양반들이 비록 돈에는 궁할지언정 마음만은 한참 넉넉할 터이다. 왜냐하면, 외나무 다리 위를 혼자 걷는 중에도 다리 밑의 물 속에 비치는 뭉게구름을 보는 여유로움은 있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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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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