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자두 서리 실패담

글: 사투리


들판에서 각종 작물이 영글어 갈 적마다 농촌 아이들은 ‘서리’란 놀이를 즐겨했다. 밀 서리를 비롯하여 참외 서리, 단감 서리, 심지어 참새 서리 등 별의별 서리를 함으로써 심심한 입과 권태로운 시간을 달래곤 하였다. 특히 여름밤에 악동들 몇몇이 벌거벗은 채 연장을 달랑이며 끝물의 참외를 서리해 먹을 때 씹히던 참외꼭지의 쓴맛까지도 참 흔쾌한 것이었다.

그 시절 동네 전답의 농작물을 주인이 알게 모르게 장난 삼아 훔쳐 머는 짓거리인 ‘서리’를 누구도 죄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모두들 일종의 세시풍속쯤으로 눈감아 주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나름대로 닭서리를 풍류로써 즐기는 듯했다. 다만 ‘송아지’ 서리란 게 없었던 점으로 보아 ‘서리’에도 일종의 불문율이 있었던 듯싶다.

어느 여름, 또래들은 덩치 큰 아이를 따라 건너 마을 자두밭으로 ‘서리’를 하러 갔다. 모두 설익은 자두를 따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이놈들! 모두 게 섰거라아!”

하며 주인이 불쑥 나타나자 큰 녀석들은 꺼병이처럼 흩어졌으나 나는 엉겁결에 그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기왕 들킨 판이라 곧이곧대로 ‘장난 삼아 한 짓’이라고 빌어 볼 작정을 하는데 답삭 덜미를 잡혀, 미처 용서를 빌 겨를도 없이 서너 대의 따귀를 모질게 얻어맞고 끝내는 저고리까지 빼앗겼다.

삽시간에 번진 동네의 소문을 들은 집안 어른들의 노기는 추상같았다. 어린 소견으로도 ‘서리’의 멋을 아는 분들이었건만 체면 때문에 그랬는지 ‘도적 떼의 두목이 된 녀석은 집안에 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두려움에 젖어 뜬눈으로 밤을 밝힌 이튿날, 날벼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더니 아버님은 예상외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 놈아, 도적질을 하려거든 만주 땅쯤 되는 것을 통째로 훔치든지!” 라는 말씀만 던지고는 돌아앉으셨다. 아마도 그 말씀으로 무죄선고를 내리신 셈이었으나 당자인 나로써 느낀 충격은 엄청났지만 그로써 ‘사람은 도적질 이외의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배워야 한다’는 걸 배운 셈이었다.

정수리에 쇠똥도 벗겨지기 전에 참으로 멋쩍은 짓으로 ‘서리꾼 두목’의 감투를 쓴 뒤부터 나는 도박과는 아예 어떤 인연도 맺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그리하여 남들은, 형제간은 물론 숙질간과 사촌간에도 하고 초상집이나 휴양지에서조차 흔히들 하는 고스톱을 비롯해 당구, 마작, 포커 같은 것들과도 담을 쌓고 살아왔으니 그 방면에서는 젬병이라 친구들과 잡기를 벌일 지경이면 매번 곤혹스러움을 면할 길이 없다.

하늘에는 별들이 저렇게 총총한데 아직도 서리 인심이 남은 곳이 있을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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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함께세상에 퍼뜨립시다.

우워사사 [우′우워사사′아] (감탄사) 여럿이 힘을 합쳐 선수들의 기운을 돋우려고 응원할 때 내는 소리. 힘내자, 힘내라는 뜻. 국적도 없이 혀 꼬부라진 말인 ‘파이팅’ 대신 순화시켜 써야할 뿌리 있는 순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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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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