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다스린 영웅, 조지 마셜
맥아더·아이젠하워·패튼 위엔 그가 있었다…
2차대전 별들 진두지휘… '겸손과 결단' 리더십
노르망디 작전 지휘 양보, 맥아더 해임 악역도 수행… '신뢰와 충직' 팔로어십
"대통령님, 저는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습관이 있음을 상기시켜 드려야겠습니다. 그리고 아시는 것처럼 그것 때문에 종종 대통령님이 불쾌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소."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알겠소."
1939년 4월 백악관, 루스벨트 대통령 면전에서 육군참모총장직 제의에 "감사합니다" 하지 않고 당돌하게 대답한 사람은 조지 마셜(1880~1959)이었다. 육군참모총장으로서 태평양의 맥아더, 대서양의 아이젠하워와 패튼 그리고 영국의 몽고메리 등 문자 그대로 '별들'을 다독여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군인, 처칠 드골 스탈린 장제스를 상대로 협상을 펼쳐 전후 질서를 창조한 국제정치의 달인, 전후 피폐한 유럽에 대규모 지원을 퍼부어 재건·부흥시킨 기획자. 신간 '마셜(원제: Marshall: Lessons in Leadership)'은 그의 리더십뿐 아니라 뛰어난 팔로어십까지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그 교훈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 ▲ 마셜(오른쪽)은 겸손한 태도로 국가와 사람 사이를 중재하면서도 단호한 결단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후(戰後) 세계질서 재편을 주도했다. 사진은 1945년 8월 23일 워싱턴을 방문한 프랑스의 샤를르 드골을 맞는 마셜.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총 안 쏘아본 군인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마셜의 임무는 '교통정리'였다. 하룻밤에 병력 14만명을 약 97㎞ 떨어진 곳으로 수송하는 등의 참모 역할이었다. 진흙탕 길에서 고장 난 트럭을 치우고 병력과 차량, 마차를 계속 이동시키느라 밤을 새는 일이었다. 그 자신은 전투를 지휘하고 싶었다. 전쟁이 끝나고 사령관 퍼싱은 국민적 영웅이 됐지만 마셜은 전시계급에서 평시계급으로 다시 강등됐다. 그러나 그는 전쟁 전체를 보는 눈을 키웠다. 부대의 편성과 병력 양성과 관리, 유지, 병참 그리고 미래의 전쟁까지. 미국은 그 이전까지 그만한 규모의 병력으로 다른 대륙에서 전쟁을 치러본 적이 없었다.
◆최고의 인재 풀, 블랙 북
1927년 조지아주의 포트베닝 보병학교 부교장으로 부임한 마셜은 1차대전 일선 지휘관 출신 교관들이 '참호전'을 가르칠 때 전차와 비행기를 이용한 '기동전'을 가르쳤다. 전국에서 유능한 장교들을 교관으로 영입해 장차 2차대전을 이끌 인재를 길렀다. 브래들리, 콜린스, 리지웨이, 밴 플리트 등이다. 이들은 '마셜의 사람들'로 불렸다. 1938년 육군참모차장이 된 데 이어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40여명의 선배 장성을 뛰어넘어 참모총장이 된 그는 자신이 '블랙 북'이라고 부른 인재 풀 노트에서 하나하나 인재를 뽑아 적소에 배치했다. 텍사스 샌안토니오에 있던 아이젠하워 준장을 워싱턴으로 불러올린 것도 마셜이었다.
◆맹수 조련사의 리더십
1941년 12월 일본군이 진주만을 습격했고 미국도 참전할 수밖에 없게 됐다. 모두가 흥분했지만 "마셜에게 전쟁은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었다". 유럽과 태평양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그가 지휘할 맥아더, 아이젠하워, 패튼, 몽고메리 등 전쟁영웅들은 하나같이 으르렁대는 맹수들이었다. 아이젠하워는 "고삐 풀린 망아지, 문제아"라고 패튼을 비난했지만 마셜은 "패튼이 계속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 보인다면, 모든 비난은 내가 받겠다. 하지만 패튼이 그의 가치보다 더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를 해임하는 것은 당신에게 달렸다"고 답했다. 4성(星)의 영국 장군 몽고메리는 국가적 경쟁심까지 더해 끊임없이 3성의 연합군사령관 아이젠하워의 권위에 도전했고, 맥아더의 권위주의도 늘 골칫거리였다. 마셜은 이 모든 난제를 차근차근 하나씩 처리했다. 때론 겸손하게 때론 단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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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들 신뢰 한몸에 받은 팔로어십
1943년 참모총장 임기가 끝나갈 무렵 마셜은 아이젠하워에게 후임을 맡기고 자신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맡고 싶었다. 그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아는 루스벨트는 그러나 "만약 자네가 미국 내에 없다면 나는 편히 잘 수 없을 것 같네"라고 말했다. 마셜은 참모총장을 연임했다. 그해 '타임'은 마셜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대통령과 의회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1946년 미 상원의 추대로 국무장관이 된 마셜은 "전쟁의 폐허에서 전 세계가 자립하려면 미국의 강력하고 명확한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마셜플랜의 시작이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석달 후 트루먼 대통령은 다시 마셜을 부른다. 이번엔 국방장관이다. 고집쟁이 맥아더를 해임시켜야 하는 임무가 도사리고 있는 자리다. 그러나 마셜은 "간단히 무엇을 원하는지만 저에게 말하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것들을 할 것입니다."
◆끝까지 조용했던 퇴장
해임된 맥아더는 카퍼레이드를 펼치며 드라마틱하게 퇴장했지만 마셜은 매카시에게 미국의 위상을 약화시켰다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마셜은 "이 시점이 내가 배반자가 아니라고 설명해야 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입을 닫았다. 195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그는 조용한 말년을 보내다 1959년 10월 눈을 감았다. 담담하면서 여운이 크다. 더러 발견되는 오자(誤字)는 독서 흐름을 방해하는 흠이다.
마셜
폴 제퍼스·앨런 액설로드 지음|박희성·박동휘 옮김
플래닛미디어|388쪽|1만9800원
김한수 출판팀장 (우리 큰애)
조선일보 2011.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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