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타 킨태와 롤로마리(3)
“에라 이 덜된 놈의 나라야, 서류고 가방이고 물 말아서 다 먹어라!” 하고 경멸에 찬 소리를 씹다가, 문득 기왕 잃어버린 걸 후회한들 무엇하랴. 그저 가난한 운전사에게 떡 하나 사준 셈치지 하며 좀 느긋이 자위를 하자니까, 시장기 탓인지 하늘이 갑자기 노랗게 보였다. 열기 뿜어 올리는 석유회사 현관 계단을 휘청하며 내려서자니까, 새까만 뭐가 코앞에 불쑥 튀어 오르며,
“주인어른(Master), 여태까지 무얼 하셨나이까. 저는 점심도 굶은 채 주인어른만 기다렸습니다 그려. 주인어어르은?”
‘아니 이 경황 중에 주인어른은 또 무슨 낮도깨비 같은 주인어른이람?’
어지럼증으로 헛것이 뵈는가 싶어 체머리를 흔들어 마음을 가다듬고 보니, ‘저런! 이게 누구야? 아침에 타고 온 택시의 토인 기사가 아니냐?’
“야, 이 무지렁이 같은 친구야, 횡재수로 한 보따리를 얻었으면 우선 튀고 볼 일이지 몇 푼이나 벌겠다고 예서 지금까지 날 기다렸나, 엉?”
하면서도 나는 지독한 암내를 풍기는 그 검은 운전사를 두 팔 벌려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그의 뺨에다 내 볼을 비비면서,
“고맙고도 고맙다, 이 친구야! 그래. 진흙에서 연꽃이 핀다더니 야만과 기만이 넘치는 여기에도, 과연 ‘지구촌의 사랑’이란 것이 있긴 있었구나. 너희 극소수의 어긋난 사람들의 덜된 소행으로 말미암아 온 나이지리아 국민을 그토록 경멸한 나를 용서해 주려무나. 부탁이다, 이 친구야. 조목 조목 따지고 볼라치면, 한국이라고 너희보다 더 나을 게 있을 듯 싶지를 않구나.”
나는 한국말로 이렇게 주문같이 웅얼거리며 먼산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이름이 ‘롤로마리’라는 그 나이지리아의 흑인 운전기사는 영화 속의 ‘쿤타킨테’처럼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미소 속에,
‘자기는 이래 보여도 알라를 믿는 진실한 이슬람교도’란 걸 뽐내는 가락으로, 내 등을 어른스레 잔잔히 두드려 주는 것이었다. 하도 기쁜 나머지 내가 그에게 인디언식으로 “친구!”라며 악수를 청했는데도 그는 끝내 나를 "주인어른(Master)"이라 부르며, 지금까지의 말투와 행동을 결코 바꾸려 들지 않았다.
영화 ‘뿌리’에서 성년식을 치른 쿤타킨테는 밀림의 평화를 존중하는 용감한 전사로서의 자질을 함양하고 있었는데, 그 청초한 이미지를 고스란히 지닌 ‘롤로마리’야 말로 쿤타킨테의 정신적 후예가 아닐까 보냐. 한 사람의 착하디 착한 순수함이 이토록 내 관념을 경멸에서 찬탄으로 바꿔 놓을 줄이야!
비록 피부 색깔이야 검든 희든, 종교야 불교든 이슬람교든 간에, 인간의 순수성은 어디라도 동일하며, 어떠한 유혹이 세차게 손짓하더라도 자기자신을 속이지 않는 떳떳한 마음과 청정한 자세,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 ‘쿤타킨테’를 빼어 닮은 나이지리아 토인에게서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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